[백세시대 / 문화이야기] 모르는 사이 사라지는 ‘손맛’
[백세시대 / 문화이야기] 모르는 사이 사라지는 ‘손맛’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9.11.22 13:46
  • 호수 6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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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 실린 김장 관련 기사를 취재하던 중 오랜 만에 여럿이 함께 김치를 담그는, 정감 있는 현장을 감상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김장철 주택가에서는 이웃끼리 옹기종기 모여 김치를 담그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배추를 절이는데 필요한 대형 통을 이웃에게 빌려주기도 하고 김장 날짜를 조금씩 달리해 품앗이를 하거나, 아예 한날 김치를 같이 담가 나누는 일도 많았다. 이웃이 아니어도 친척들이 함께 모여 김장 김치를 담그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1~2인 가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집에서 밥을 먹는 것보다 외식이 잦아지면서 가정 내 김치 섭취량이 줄자 김장을 하기 보다는 포장김치를 사먹는 가정이 늘어났다. 최근에는 김장나눔봉사 외에는 대규모로 김치를 담그는 모습을 보기 어려워졌다. 

더 큰 문제는 현재 젊은 사람들 중 김치를 담가 먹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독립해 가정을 꾸린 필자의 또래 지인들 중 올해 김장을 한 사람은 없다. 결혼한 지인들은 양가 부모가 만들어준 김치를 얻어먹거나 포장김치로 해결하고 있다. 먼 훗날 언젠가 김장 문화는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필자의 친할머니와 큰고모 등은 한국전쟁 때 북한 함경북도에서 남으로 피난을 왔다가 그대로 정착을 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와 큰고모가 만든 음식은 북한식이 많았다. 명절마다 지겹도록 먹었던 녹두빈대떡도 북한음식이었다. 돼지고기를 갈아 김치와 고사리와 숙주 등을 버무려 철판에 부친 것으로 흔히 먹는 김치전이나 해물파전과는 식감과 맛이 완전히 다르다. 그나마 서울 종로 광장시장에서 판매하는 녹두빈대떡의 맛이 비슷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 맛을 온전히 내는 건 현재 90대에 접어든 큰고모뿐이었는데 20여 년 전부터 요리에 손을 떼면서 이제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됐다. 필자가 어린 시절 큰고모와 사촌형과 함께 이 빈대떡을 함께 만든 적이 있다. 큰고모는 아들인 사촌형에게 며느리 고생시키기 싫다며 “내가 음식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만 만들어 먹자”고 선언을 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현실이 됐다.

어느 집이나 그 집안을 대표하는 ‘손맛’이 있다. 대가족이 모여 살던 시대에는 대부분 후대에 전수가 됐지만 핵가족을 거쳐 1~2인 가구 시대로 넘어오면서 각자 고유의 특색을 갖춘 손맛들이 사라지고 있다. 물론 대중적으로 알려진 레시피를 통해 흉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어른들의 노하우가 담긴 맛의 한끝 차이까지 따라하는 건 불가능하다. 

‘녹두빈대떡’처럼 수많은 음식을 만드느라 고생하셨던 어르신들에게 늦게나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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