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세모의 노래 ‘나그네 설움’
[백세시대 / 금요칼럼] 세모의 노래 ‘나그네 설움’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9.11.29 14:34
  • 호수 6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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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나그네 설움’ 발표되자

음반 10만장 팔리며

가수 백년설 인기 하늘 찔러

일제는 백년설에 군국가요 강요

이후 가혹한 비판 받아

이 한 해도 서서히 저물어갑니다.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으리오만 지난 한 해는 유난히 소란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일일이 돌이켜 생각조차 되새기기 싫은 일들이 특히 많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과거로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며 다시 한 해를 맞이할 자세를 가질 시기입니다. 살아가면서 여건과 환경이 점점 좋아지고 향상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첫눈이 소복이 내린 산길을 걷노라면 눈 위로 나보다 먼저 그 눈길을 밟고 간 흔적이 찍혀 있습니다. 뾰족한 굽이 저쪽 등성이 쪽으로 길게 나 있는 것은 틀림없이 고라니의 발자국입니다. 작은 앞발과 엉덩이로 가볍게 찍으며 걸어간 녀석들은 산토끼의 자취네요. 그들은 지난 밤 이 산길을 외로이 어디론가 방향을 정하고 터벅터벅 걸어갔습니다. 

그 발자국을 보면서 이 한 해 내가 걸어온 발자국을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이곳 저곳 참 부지런히 많이도 다녔습니다. 초청 강의, 행사 참가, 집회, 동창회, 월례모임, 여행 등등 자고 나면 새롭게 생겨나는 각종 일정을 낱낱이 소화하면서 이 한 해를 살아왔군요.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뜻깊은 활동이었던가는 자신 있게 말할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이렇게 한 해가 떠나가는 무렵에 부르면 좋을 노래들이 생각납니다. ‘과거는 흘러갔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가는 세월’ ‘종점’ 등 여러 곡들이 우선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특별히 잘 어울리는 노래 하나가 있지요. 바로 ‘나그네 설움’(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 노래)입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네

선창가 고동소리 옛 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타관 땅 밟아서 돈지 십 년 넘어 반평생/ 사나이 가슴속에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가야할 지평선에 태양도 없어

새벽 별 찬 서리가 뼛골에 스미는데/ 어디로 흘러가랴 흘러갈소냐

이 노래에서 ‘나그네’는 식민지시대의 나라 잃은 망국실향민입니다. 망명객의 처연한 심정과 당시 우리 민족 전체의 현실을 잘 담아내고 있는 상징적인 노래입니다. 2절에서는 방랑자의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고, 3절에서는 핍박과 고난에 시달리는 겨레의 설움이 느껴집니다. 힘든 시간 속에서도 새벽을 기다리는 심정적 간절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1940년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전후 시기에 일제는 내선일체 및 창씨개명을 실시하고 곧바로 지원병 제도까지 수립해서 노골적인 한민족 말살 정책을 펼쳐갔습니다. 그러한 때에 발표된 이 노래는 가사와 곡조의 애잔함과 곡진함이 대중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폭발적 인기를 얻었고, 무려 1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고 합니다. 이 노래 한 곡으로 제작사였던 태평레코드사의 위상이 높아지고 가수 백년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인기 때문에 백년설은 일제의 통치이념이 담긴 군국가요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될 위기를 겪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이는 백년설보다 조금 적지만 일찍 가요계에 데뷔했던 남인수보다 인기가 한층 높았기 때문에 이런 강압적 봉변을 겪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백년설이 불러서 히트했던 곡으로는 데뷔곡인 ‘유랑극단’을 비롯해서 ‘번지 없는 주막’ ‘두견화 사랑’ ‘나그네 설움’ ‘어머님 사랑’ ‘일자일루’ ‘비오는 해관’ ‘산 팔자 물 팔자’ ‘만포선 길손’ ‘복지만리’ ‘대지의 항구’ ‘눈물의 백년화’ ‘마도로스 수기’ ‘눈물의 수박등’ ‘고향 길 부모 길’ ‘한잔에 한잔 사랑’ ‘고향설’ ‘삼각산 손님’ 등입니다. 이런 노래들은 험난한 일제 말 해체와 붕괴의 시대를 살아가던 민중들에게 크나큰 위로와 격려를 주었습니다. 그러니 군국가요를 불렀다며 그를 가혹하게 비판만 하지 말고 이런 빛나는 활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너그럽게 백년설의 활동을 감싸 안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1957년에는 영화 ‘나그네 설움’이 제작 개봉되었는데 이예춘, 박노식, 김금자, 이성일, 김예실 등이 출연했습니다. 1963년 가수 백년설 선생은 은퇴 공연을 마지막으로 열고 가요계를 아주 떠났습니다. 1982년에는 일본의 중견가수 미즈노 고오지가 한국가요 앨범을 발매할 때 ‘나그네 설움’을 번안가요로 불러서 자신의 앨범에 넣었습니다. 1999년에는 독일 출신 재즈그룹 살타첼로의 내한공연에서 공연실황음반을 내었는데, 그 다섯 번째 곡으로 ‘나그네 설움’을 편곡해서 ‘Dawn chorus’란 제목으로 바꾸어 수록했습니다. 2001년엔 악극 ‘나그네 설움’이 경기도 구리시에서 공연되어서 많은 관중들의 눈물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세밑에 우리는 절창 ‘나그네 설움’의 한 대목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부분을 나직하게 읊조려보면서 우리가 살아온 삶과 역사를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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