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 신위 탄생 250주년 기념 서화전’…시‧글씨‧그림에 모두 능했던 조선 최고 예술인 신위
'자하 신위 탄생 250주년 기념 서화전’…시‧글씨‧그림에 모두 능했던 조선 최고 예술인 신위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0.01.10 15:38
  • 호수 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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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 유덕장 등과 3대 묵죽화가로 유명…‘묵죽도’,‘경수당전고’ 등 85점 

3부자가 합작한 ‘시령도’, 줄기 가늘고 여백 넒은 대나무 그림 등 눈길

시‧서‧화에 능해 삼절이라 불린 신위는 조선 3대 묵죽화가로 칭송받을 만큼 대나무를 유독 잘 그렸다. 사진은 그가 1800년대 초에 그린 대나무 그림.
시‧서‧화에 능해 삼절이라 불린 신위는 조선 3대 묵죽화가로 칭송받을 만큼 대나무를 유독 잘 그렸다. 사진은 그가 1800년대 초에 그린 대나무 그림.

[백세시대=배성호기자] ‘돌아이’ 시리즈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을 선보여 ‘한국의 성룡’이라고도 불리는 가수 ‘전영록’, 연기자로 활약하는 한국 록음악의 산증인이자 ‘산울림’의 보컬 ‘김창완’. 이들은 노래와 연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성공적으로 잡아 ‘종합 예술인’라고 불린다. 시‧서‧화를 예술의 으뜸으로 삼았던 조선에서도 이 세 분야의 모두 능통했던 인물을 삼절(三絶)이라 불렀다. 수많은 문인 중에서도 김정희(1786~1856), 강세황(1713~1791) 등만이 이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두 사람 보다 더 앞섰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 있다. 바로 자하(紫霞) 신위(1769 ~1847)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에서 ‘자하 신위 탄생 250주년 기념 서화전: 자줏빛 노을에 물들다’를 내년 3월 8일까지 열고 있다. 이번 특별전에는 조선 최고의 삼절로 꼽히는 자하 신위가 남긴 ‘묵죽도’ 등 25건 85점의 유품이 전시된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난 인물을 삼절이라 하지만, 실상 세 가지를 모두 최고 수준으로 성취한 인물은 신위를 빼고 달리 찾기 어렵다. 신위는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평가받지만 그 삶과 예술의 깊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다. 헌데 그는 생전에 이미 “두보(杜甫)의 시를 배우듯 신위의 시를 읽는다”라고 할 정도로 대가로 인정받았고, 현재는 ‘쇠퇴해 가는 시대에 훨훨 날아오른 대가’라 하여 고전 문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신위는 당대의 명필 송하(松下) 조윤형(1725~1799)의 딸을 배필로 맞았지만 아들을 얻지 못하고 부실(첩, 副室) 조씨(趙氏)에게서 네 서자를 얻었다. 평산신씨(平山申氏) 명문가라는 무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양으로 적자를 잇지 않고 네 아들을 동등하게 길러내었다. 그는 자녀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기를 바라고 격려했다.

3부자가 합작한 ‘시령도’(시 짓는 배 그림, 詩舲圖)에는 신위 부자의 가족애가 담겨있다. 문장과 산수화로 이름을 남긴 맏아들 신명준(1803~1842)과 화사한 꽃그림으로 일세를 풍미한 둘째 아들 신명연(1809~1886)이 아버지 신위와 합작한 두루마리 작품으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처음 공개되는 신위의 필사본 문집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곳곳에도 아들들을 애틋해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잘 담겨있다.

신위의 시는 청신(淸新)하고 회화성이 넘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붉은 여뀌를 노래한 시’이다. 1832년에 지은 ‘정원 속 가을 꽃 열네 수’ 가운데 한 수로 “물가에 무성한 여뀌 꽃은 작은 배에 들어오네”라는 시구 등을 통해 조각배를 집 삼아 강호에 누운 유유자적한 마음을 드러낸 시다. 글씨에는 자연스러운 변화가 흐르고 있고 노년의 신위가 도달한 원숙한 경지를 느낄 수 있다.

또 신위는 제화시를 지어 서화를 평론하기도 했다. ‘장수를 축원하는 마고’가 대표적이다. 청나라 문인화가 박명(?~1789)은 북경을 발문한 조선 사신의 생일을 축하해 도교에서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마고선녀가 서왕모에게 영지로 빚은 술을 바치며 장수를 축하하는 내용을 담은 그림을 그려 선물한다. 신위는 약 100년 후 이 그림을 감상하고 세월의 무상함을 읊은 시를 여백에 써 넣었다.

조선 최고의 명필 중 한 명인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년)는 고대 비석 연구를 토대로 독특한 서풍을 창출했고, 신위는 왕희지(303~361)를 모범으로 삼아 우아한 서풍을 연마하여 서로 다른 개성을 보여줬다. 신위와 김정희는 문신이자 서예가인 윤정현(1793~1874)을 위해 그의 호인 ‘침계’를 써 주었다. 김정희의 ‘침계’(간송미술관 소장)와 신위의 글씨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서예는 지향점은 다르지만 19세기 조선 문인이 다다른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다.

또한 신위는 탄은(灘隱) 이정(1554~1626), 수운(峀雲) 유덕장(1675~1756)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손꼽혔다. 당시의 권세가들은 그의 대나무 그림을 얻고자 앞다퉈 그를 찾았다. 신위의 대나무 그림은 줄기가 가늘고 여백이 넓어 고아한 인상을 풍긴다. 옛 선비들은 대나무의 올곧은 품성을 사랑해 먹으로 대나무를 그렸다. 신위는 어려서부터 강세황에게 묵죽을 배웠으며 중국 양주팔괴(청나라 중기 장쑤성 양주에 모인 8인의 개성파 화가) 중 한 사람인 정섭의 대나무 그림을 재해석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완성한다. 

신위는 승정원 승지로 근무할 때 그림을 감히 부탁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하급 서리에게 “내가 어찌 너에게만 인색하게 굴 것이냐”라고 웃으며 그 자리에서 대나무를 그려주었다는 일화는 신위의 소탈한 사람됨을 잘 보여준다. ‘그림보다도 가슴 속의 대나무를 완성하는 것이 먼저’라는 ‘흉중성죽(胸中成竹)’이라는 말은 예술에 앞서 인격을 닦아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그가 그린 ‘묵죽도’의 담백한 붓질에는 사람을 지위로 차별하지 않았던 인품이 그대로 묻어난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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