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에 나오지 않는 조선왕조이야기 2]두 번 이나 이혼한 ‘문종’, 낮과 밤이 달랐던 ‘성종’
[사극에 나오지 않는 조선왕조이야기 2]두 번 이나 이혼한 ‘문종’, 낮과 밤이 달랐던 ‘성종’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0.01.10 15:40
  • 호수 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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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조선의 왕 중 가장 술을 좋아했던 인물이며 실록에는 이와 관련한 다양한 에피소드가 기록돼 있다. 사진은 영화 ‘관상’에서 세조(수양대군)를 연기한 이정재의 모습.
세조는 조선의 왕 중 가장 술을 좋아했던 인물이며 실록에는 이와 관련한 다양한 에피소드가 기록돼 있다. 사진은 영화 ‘관상’에서 세조(수양대군)를 연기한 이정재의 모습.

문종 첫째 빈(嬪) 요상한 방술 쓰고 두 번째 빈은 동성애하다 쫓겨나 

성종, 경국대전 편찬 등 큰 업적 남겼지만 주색잡기 몰두한 ‘밤의 황제’

[백세시대=배성호기자] 재위 기간은 2년이 채 되지 않지만 세종의 맏아들로 무려 30년 간 세자 생활을 했던 조선의 제5대왕 문종. 그는 언로(신하들이 임금께 말을 올릴 수 있는 길, 言路)를 자유롭게 열어 민정파악에 힘썼고 1445년 세종이 병들자 그를 대신하여 국사를 처리하며 성군으로서의 자질도 엿보였다.

하지만 그는 불운하게도 조선시대 임금 중에 가장 풍파가 많은 결혼생활로 유명하다. 두 번의 이혼과 한 번의 사별을 겪었던 것이다. 특히 두 번의 이혼은 조선시대에 있어선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축첩은 허용됐지만 본처와의 이혼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절대 허용해주지 않았다.

문종의 첫 번째 세자빈인 휘빈 김씨는 실록에서도 외모를 보지 않고 뽑았다고 기록할 정도로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다. 이미 여러 궁녀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있던 문종의 눈에 들 리가 없었으며 결혼 첫날 이후부터 소박을 맞았다고 한다. 이에 세종은 몇 번을 타이르고 세자빈에게 신경을 쓰라고 이야기했으나 부부생활은 좀체 개선되지 못했다.

다급해진 휘빈 김씨는 세자가 자신에게 빠져들게 할 갖가지 방술을 익히며 기행을 벌이기 시작했다. 문종의 수발을 드는 궁녀들의 신발을 훔쳐내 그것들을 태워 재로 만든 다음 세자가 마시는 술에 그 재를 몰래 넣어 마시게 하면 문종이 본인만 찾게 된다는 비방이었다. 결국 신발이 자꾸 사라진 궁녀들이 자체 조사에 나선 결과 이러한 사실이 드러났고 망신을 당하게 된 세종은 재빨리 세자빈을 폐출하고 새로운 세자빈을 뽑았다. 

이후 외모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 세종대왕은 철저한 외모지상주의 면접체계인 삼간택(三揀擇)이라는 선발규정을 만들었고 이후 조선시대 세자빈, 왕후 선발의 모범이 됐다. 이렇게 뽑힌 순빈 봉씨는 외모는 괜찮았지만 술버릇이 좋지 못했고 음주가무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문종은 엄청나게 가부장적인 유학자로 부인의 음주가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금세 둘 사이는 멀어졌다. 순빈이 좀처럼 임신을 하지 않자 세종은 고심 끝에 세자에게 후궁 3명을 들이기로 결정했다. 후궁의 등장에 다급해진 순빈은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했고, 이후 한 달 쯤 지나서 유산했다고 또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실이 밝혀지며 왕실의 미움을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문종이 또 이혼했다간 왕실과 문종의 평판이 나빠질까봐 순빈을 안고 간다. 그러다 도저히 폐출할 수밖에 없는 일이 터지고 만다. 순빈이 궁녀와 동성애 행각을 벌인 것이다.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된 세조는 애주가로도 유명하다. 특히 신하들과 술자리를 자주 가졌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와 관련된 다양한 사연이 기록돼 있다. 대표적으로 세조에게 ‘야자타임’을 하자고 한 학자가 있었다. 최초의 한글 시 ‘용비어천가’를 지은 ‘정인지’다. 그는 계유정난의 1등 공신으로 세조의 신뢰를 받았다. 문제는 그가 술이 약해서 사고를 자주 일으켰다는 것이다. 

세조 4년(1458) 경회루에서 대소신료를 불러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는데 이때 정인지는 세조의 면전에 두고 역사에 남을 말을 남긴다. 바로 최고 권력자 세조에게 “너(汝)”라고 한 것. 중신들은 처벌을 간청했으나 세조는 “늙은 영감이 그랬는데 뭘 그러냐”라며 의외로 그냥 넘어간다. 스무 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났고, 이미 퇴역한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살려준 것이다.

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예종은 조선시대 역사상 가장 빠르게 ‘아버지’가 된 왕이다. 1460년 당시 세자였던 예종은 11살에 5살 연상인 한 씨와 혼인하게 된다. 그리고 1년 만에 장순왕후가 회임해 아들 인성대군을 낳았다. 인성대군이 태어난 해가 1461년. 예종은 현재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인 12세에 아버지가 된 것이다. 일찍 아버지가 된 탓일까. 즉위한지 1년 만인 20세의 나이에 예종은 승하한다. 

예종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 뒤를 이은 예종의 조카 성종은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라는 별명을 가진, 자타가 공인하는 ‘밤의 황제’였다. 낮에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였던 ‘요순’처럼 정사를 돌봤고, 밤엔 중국 하나라의 ‘걸’과 은나라의 ‘주’처럼 주색잡기에 능한 임금이라는 뜻이다. 이런 별칭에 걸맞게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편찬 등 큰 업적을 남긴 반면, 거의 매일 밤 곡연(임금이 궁중에서 가까운 사람들만 불러 베풀던 소연)을 베풀고 기생들과 어울렸으며 많은 후궁을 거느렸다. 25년의 재위 기간에 3명의 왕후와 9명의 후궁을 맞아들였고 16남 12녀를 거느렸다. 자식이 너무 많아 궁궐에서 다 기를 수 없게 되자 궐 밖 여염집에 살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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