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세니오르 스크립투스
[백세시대 / 금요칼럼] 세니오르 스크립투스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 승인 2020.01.17 13:50
  • 호수 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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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서사의 시대가 끝나고

지금은 개인 서사의 시대

드디어 때 만난 어르신들이시여

가물거리는 기억일망정

매일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 

‘시니어’라는 말은 주로 영어로 알고 있지만,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라틴어 ‘세니오르(sénĭor)’에서 왔다. 노인, 어르신, 노장, 선배, 장로, 원로 등으로 해석 가능한 이 시니어는 이제 ‘실버’라는 말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노년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세월의 지혜를 담은 수많은 역사를 ‘적어’ 남겨왔고, 우리는 그 ‘적힌 것’을 역사라고 불렀다.

문자와 카톡, 유튜브와 틱톡 등 넘치는 시각적 유희가 감각을 잠식한 지 오래다. 빨리 보내고 많이 보내니 그야말로 가성비 최고이고, 눈으로 보고 댓글로 확인하니 선택의 고민도 확연히 적고 마음갈등도 적어 가심비(가격 대비 만족도) 역시 최상이다. 그중 티브이를 넘어선 독보적 정보 창구인 유튜브는 세상의 모든 것을 무차원적이고 무공간적이며 무시간적으로, 심지어 언어적 경계와 문화적 경계를 넘어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류문화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과거 라디오스타들이 귀를 사로잡으며 밤에 창공의 별 넘어 세상을 상상하게 하고 보이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밤새 사랑의 신경세포를 집중시켰다. 그리고는 이내 티브이가 등장하며 세상의 주인은 티브이 스타로 바뀌었다. 록그룹 퀸의 노래처럼 ‘비디오가 나오고 라디오 스타는 끝장났다(Video kills the radio star!).’ 브라운관에 등장한 독보적 인물들은 감각의 80%를 차지하는 인류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아, 상상하던 별 너머의 전설은 눈에 보이는 아이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스마트폰 속 평범한 이들의 대반란이 시작되었다. 

유튜브가 개인 서사 시대를 열면서, 과거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길가메시 등 인류의 독보적 영웅 서사 시대는 종말을 맞았다. 기록에도 없던 이들이 기록을 만들기 시작한다. 알고자 하는 이 없어 누구도 알지 못했던, 영웅들의 면모에 비해 너무나 비루해서 감추기 급급했던 바로 그 평범한 이들이 개인 역사를 공개하기 시작하자, 혁명이 시작되었다. 숨겨졌던 것들이 드러나자 조명은 영웅에서 개인에게 돌아갔고, 가장 평범한 것들을 말하는 이들에게 관심과 환호가 시작되더니 어느덧 그들은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숱한 ‘스타’들이 나타나면서 지금의 세상은 별만큼이나 많은 스타가 자신만의 세계를 쓰고 보이면서 새로운 영웅 서사를 만들고 있다. 영웅들에게만 주어졌던 한정적 역사의 종말이 오고, 나의 역사가 모두의 역사가 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평범한 일상도 역사가 될 수 있구나! 일상이 역사가 되는 과정의 핵심은 ‘기록’이다. 정사(正史)든 야사(野史)든 남은 기록을 ‘역사’라고 부른다면, 유튜브 역시 영상으로 남는 역사일 것이다. 영상은 기록이라는 2차원에 시공간을 넣어 3차원으로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모든 영상은 시각적으로 구현된 글이다. 

모두가 열광하던 영웅 서사의 시대가 끝나고 개인 서사의 시대가 왔다면, 드디어 살아있는 인간 문서인 시니어들은 제철을 만난 셈이다. 별 볼 일 없는 이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이야기가 보고 듣고 환호하는 대상이 된다면, 개인 역사로 치자면 최소한 반세기 이상의 기억을 가진 자, 소소하지만 젊어도 보고 늙어도 본 자, 풍요도 겪어봤지만 꺾임도 아는 자, 넘어져도 봤지만 여러 번 일어나 본 자의 역사야말로 순간마다 드라마요, 서사 중 대하 서사라 할만하다. 

역사는 쓰는 자의 것이다. 영웅 서사, 세계사, 한국사에 열광했던 이 세대가 개인 서사를 시작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그들의 역사 쓰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를 쓰기 시작해보자. 호모 스크립투스(Homo Scriptus), 기록하는 인간! 인간은 근원적으로 자기 쓰기 DNA를 가지고 있다. 이제 말해도 되는 세상이고, 쓸만한 시간도 있고, 써도 괜찮은 나이가 되었다. 그렇다면 기록을 시작하자. 내가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사를 모르고 그리움만 남아 아쉬웠듯, 족보를 잃은 시대 우리는 가족의 역사를 잃었다. 아버지의 기록이 있다면 이는 곧 할아버지의 기록이 되고 이는 다시 증조할아버지의 기록이 될 것이다. 어머니의 기록이 시작된다면 할머니와 증조할머니의 기록이 되면서 그렇게 가족의 역사가 남겨진다. 

할 수만 있다면 매일 글쓰기를 하자. 아무 생각이든, 별 차이 없는 일상이든 좋다. 권하자면 손주의 나이에 따라가며 나의 기억을 적어보자. 그리고 아이와 짝을 맞추어보자. 할아버지 할머니가 기억하는 증조부와 증조모 이야기를 듣는 아이는 1세기의 기록을 살아있는 역사문서를 통해 듣고 보고 읽게 된다. 기억을 찾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 출판할 생각도 아직은 없으니 순서가 뒤죽박죽이어도 좋고, 이래저래 기억이 가물거리면 좀 있어 보이게 연출해도 좋다. 어차피 역사는 기록한 자의 것이고 검증하기도 어려울 것이니 걱정 말자! 일단 쓰면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시니어의 개인 역사는 이미 사회적이며 충분히 역사적이다. 이제 100년의 세월을 담는 걸어 다니는 역사콘텐츠로서 가족의 혈연역사, 세대의 경험역사, 그 대서사를 시작해보자. 세니오르 스크립투스, 기록하는 노인이 쓴 가족 역사가 모여 20세기와 21세기 역사 퍼즐이 될 것이고, 22세기 인류는 이를 역사책에서 보게 될 것이다. 오늘, 가족 역사를 시작하는 볼펜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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