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17] 비와 세월의 이야기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17] 비와 세월의 이야기
  • 허윤만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 승인 2020.01.31 13:57
  • 호수 7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와 세월의 이야기 

잠 못 이루는 삼경(三更) 밤에

근심은 찬 비 따라 생겨나네

내일 아침 이 내 귀밑머리엔

흰 눈이 몇 가닥 더 내릴까

不寐過三夜 (불매과삼야)

愁從冷雨生 (수종냉우생)

明朝看我鬢 (명조간아빈)

白雪幾添莖 (백설기첨경)

- 정수강(丁壽崗, 1454~1527), 『월헌집(月軒集)』 1권   「한겨울 밤에 빗소리를 듣다[仲冬夜聞雨聲]」


비는 사시사철 내리지만 ‘겨울비’라고 하면 유독 더 쓸쓸한 감성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 그것도 눈이 되기 직전에 가장 차가운 상태로 내리는 비다 보니 맞는 사람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더 스산한 느낌을 주기 십상이다. 겨울이면 다들 하늘에서 눈이라도 내리기를 바랄 터인데, 날씨가 좀 풀린 겨울날에 냉랭하게 내리는 찬비는 마치 부르지 않은 불청객 같기도 하고 몰려올 추위를 예고하는 소식꾼같기도 하다.

이번 겨울도 유독 눈 소식보다는 비 소식이 많다. 어쩌면 찬비는 건조한 겨울 대지를 적셔 화마(火魔)를 막아주는 고마운 비일런지도 모르겠다. 온 인류가 호주 땅에 겨울비가 쏟아지길 바라는 때라서 더욱 그럴까. 하지만 그래도 막상 닥쳐오는 겨울비를 만나면 ‘쓸쓸함’ ‘처량함’이란 단어들이 먼저 곁을 스쳐 지나가게 마련이다.

위 시의 저자인 정수강(丁壽崗)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500년 전 사람에게도 겨울에 내리는 찬비는 지금과 다름없이 쓸쓸하고 처량했다. 삼경(三更)은 현대 시각으로 치면 밤 11시에서 1시 사이로, 전기가 일상화된 요즘 사람들에겐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지만, 흐릿한 등잔불 하나에 의지해 밤을 지새우곤 했던 옛날 사람들에겐 한참이나 야밤이다. 하지만 창밖으로 추적추적 내리는 찬비의 음산함 때문인지 저자는 미처 잠들지 못했고, 머릿속 한 켠에는 한 가닥 근심만 생겨나고 있다.

3, 4구를 살펴보면 저자가 과연 무엇을 근심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엿볼 수 있다. 이제 곧 노년을 바라보는 처지에, 이 차가운 겨울밤 지내고 나면 흰머리가 몇 가닥이나 더 늘었을지…. 덧없이 구름처럼 흐르는 세월에 묻혀 이제는 살아갈 날 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아진 인생에 대한 회한이 쌀쌀한 겨울밤 차가운 비를 타고 심상(心想)을 두드린다. 더욱이 밖에는 눈 대신 비가 내리는데, 역설적으로 저자의 머리에는 오지 않는 눈이 대신 내릴 판이니 말이다. 예전에 시를 배울 적에 시인들이 허구한 날 읊어대는 귀밑머리 희어졌느니, 머리에 흰 눈이 내렸느니 하는 소리들을 그저 심드렁하게 흘려듣곤 했었다. 그것도 연보(年譜)를 따져 보면 이제 겨우 마흔 문턱에 접어들었을 시인이 저리도 흰 머리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과장도 좀 적당히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 말들이 과장이 아닌 진솔한 신세 한탄이었음을 그리 오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이제 마흔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필자의 머리에도 하루가 다르게 흰 눈이 쌓이는 것을 거울로 볼 때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머리가 왜 그래?”라며 짐짓 놀란 눈으로 바라볼 때마다, 그 마흔 문턱의 시인들이 과연 이런 심정으로 시를 썼겠구나 여실히 느끼면서, 예전 나의 무지함에 부끄러워지곤 한다.(중략)    

허윤만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