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가 만드는 문화콘텐츠] “김삿갓은 한시를 대중화한 민중시인이었다”
[독자가 만드는 문화콘텐츠] “김삿갓은 한시를 대중화한 민중시인이었다”
  • 정훈대 충남 태안군 안면읍 창기3리 노인회장
  • 승인 2020.02.14 14:58
  • 호수 7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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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조부를 비판하는 시를 써 향시(鄕試)서 장원

이후 집 떠나 방랑…1000여편 시 중 456편 전해져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성심(生深) 호는 난고(蘭皐)며 일명 김삿갓(金笠)이라 불렀다. 조선 순조 7년(1807) 3월 13일 한양성의 북서쪽인 경기도 양주군 화동면의 북한강 인접한 곳에서 태어났다. 5세 때인 1812년 12월 평안도의 청천강 북쪽 지역에서 일어난 홍경래난이 그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조정의 서북지방에 대한 차별에 반발하고 관리들의 수탈과 학정에 저항해서 일어난 이 난은 단 10일 만에 청천강 북쪽 지역의 8개 군·현을 장악해 버릴 정도로 백성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이 때 공교롭게도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은 그 8개 군·현 가운데 하나인 평안도 선천부사로 있었다. 그는 이 홍경래의 난 때 반란군에 패해 항복하고 말았다. 홍경래가 죽은 뒤 김익순은 죄를 모면하려고 농민 조문형을 시켜 반란군 장수 김창시의 목을 베어오라 명하고 그 대가로 1000냥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조문형은 그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음모사실을 조정에 밀고함으로써 김익순은 결국 모반대역죄로 참수형을 당했다. 다행히 김조순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은 목숨을 구했으나 이들이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당시 6세이던 김병연은 형 김병하(金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에 있는 머슴의 집으로 피신해 살았다. 7세 때는 가족이 다시 북한강변에 모여 살게 되지만 그곳에서 아버지, 동생과 사별하는 아픔을 겪는다.

김병연의 어머니는 친정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으로 내려갈까도 생각했으나,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병연 형제를 데리고 강원도 영월에서 숨어 사는 길을 선택했다. 김병연은 여기서 서당에 다니게 되었고 20세 되던 해에 ‘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 홍경래의 난 때, 순절한 가산 군수 정공의 충절을 찬양하고, 항복한 김익순을 규탄하라)’이란 시험 제목의 향시(鄕試)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다.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렸으나 어머니는 기뻐하기보다는 침통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이제까지 숨겨왔던 집안내력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향시에서 장원한 동기가 자기 자신의 조부에 대한 상소의 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고 김병연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죄책감에 아내와 두 아들 학균·익균, 홀어머니를 뒤로한 채 22세 때에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선다. 역적의 자손인데다 조부를 욕하는 시를 지어 상을 탔으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 볼 수 없는 죄인이라는 자책감에 삿갓을 쓰게 되었고 이름도 김병연 대신 김삿갓이라 스스로 불렀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도 그의 모습을 보고 김삿갓이라고도 하고 金笠(김립)으로 부르기도 했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해학과 풍자를 담은 시들을 비롯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의 시는 소재나 형식에서 규범과 탈 규범을 넘나들기도 한다. 한시의 전통적 방식을 거침없이 해체해서 파격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한시를 음이 아닌 뜻으로 읽게 한다든지 한글을 섞어서 쓰는 시들이 그런 경우가 될 것이다. 

그는 1863년(철종 13년) 봄에 57세의 나이로 전라도 동복현(전남 화순군 동복면) 달천변에서 35년간의 긴 방랑시인의 삶을 마감했다. 그가 그곳을 죽음의 자리로 택한 것은 무등산 자락에 있는 달천이 적벽강이라 부를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기 때문이라 한다. 

김병연은 1000여 편의 시를 쓴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재까지 456편의 시가 발견됐다. 애절한 눈물과 한숨도 한 줄기 노래가 되어 뭇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풍자시로 분류되는 ‘무등산과 적벽강’도 따지고 보면 한 편의 풍경시요, 서정시라 할 수 있다.

그가 현대인에게도 익숙한 사람이 된 것은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이야기와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꽃잎처럼 낙엽처럼 날려버린 시(詩)들을 이응수(李應洙)가 전국을 돌며 수집 정리하여1939년에 비로소 그가 죽은 지 76년만에 첫 시집인 ‘김립시집’을 엮어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시집에 실린 다양한 시들과 흥미 있고 통쾌한 일화들을 자료로 삼아 여러 시인, 작가들이 시집과 소설로 발간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욱이 근래에 와서 다분히 흥미 위주로 보아온 그의 작품들에 대해 형식의 파격성과 내용의 민중성을 문학사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이 몇몇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서 성과를 거두고 있기도 하다. 

그가 쓴 시는 해학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한문 또는 한시를 대중화한 것으로 봐야 한다. 김삿갓은 삐뚤어진 세상을 농락하고 기성 권위에 도전했으며, 민중과 함께 숨쉬며 탈속한 참여 시인이었고 민중시인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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