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크루즈에 대한 연민
[백세시대 / 세상읽기] 크루즈에 대한 연민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0.02.21 14:14
  • 호수 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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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가 극성을 부리던 지난 몇 주 동안 가장 힘겨운 시간을 보낸 집단 중 하나가 크루즈 여행객들일 것이다. 일본 요코하마항에 정박 중인 호화 크루즈 다이아몬드 프린세스에 감염증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이 배는 바다 위 ‘호텔’이 아니라 바다 위 ‘지옥’으로 변했다. 

크루즈 여행의 백미는 끊임없이 제공되는 최상의 음식과 멋진 바다 경치, 선상에서의 다양한 오락 프로그램 등을 즐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배의 승객들은  즐거움은커녕 언제 ‘죽음의 키스’를 당할지 모르는 극한의 상황에서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다. 다행인 점은 보름 넘게 배에 갇혀 지내던 한국인들이 우리 공군3호기를 타고 무사히 귀국한 사실이다.   

기자는 크루즈 승객 코로나 감염증 보도를 보고 혹시나 했다. 예감은 들어맞았다. 기자가 2014년 4월 26~5월 2일, 6박7일간 일본의 요코하마·아오모리·도야마·마이즈루 등 4개 도시를 돌았던 바로 그 배였다. 

크루즈(Cruise·유람선)는 전염병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구조다. 배에서 내린 홍콩 사람이 확진자란 걸 안 순간 ‘다들 죽었구나(?)’라는 불길한 생각마저 들었다. 배의 크기는 조깅 할 만큼 넓고 아파트 10층처럼 높으며 복도는 미로 같이 얽혀 있고 골방 같이 외진 곳이 많지만 그래봤자 하나의 커다란 ‘놀잇배’에 불과하다. 확진자가 자고나면 수십 명씩 불어난 이유다. 

배에 있었던 일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의심 환자에 대해 격리나 다른 승객의 보호 등 특별한 조치가 없었던 듯하다. 설사 객실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더라도 배안의 공기마저 완벽한 진공 상태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음식과 물을 전달해주는 누군가를 통해서도 확산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기자는 수년 전 크루즈를 탔던 기쁨의 순간이 생생하다. 서울에서 비행기로 일본 도쿄 하네다공항에 도착해 버스 편으로 요코하마항으로 이동했다. 희고 거대한 크루즈를 본 순간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 승선 전 입국심사를 거쳤다. 배를 하나의 국가로 간주해 여권과 입국신고서 등을 제출한다.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2시간여 동안 줄지어 기다려 수속을 마치고 신용카드처럼 생긴 신분증을 하나씩 받았다. 카드는 방문키를 비롯 승·하선 시 출입증으로 쓰인다. 카드 앞면엔 비상시 집합장소가 인쇄돼 있다. 

18층의 배안을 엘리베이터로 이동한다. 기자의 방은 침대와 세면실, 화장실을 갖춘 5평 정도의 작은 룸이지만 바다로 이어진 베란다 때문에 답답하지 않다.  선실 벽에 기대면 미세한 떨림이 감지되지만 침대에선 아무런 진동도, 배의 움직임조차 못 느낀다. 

출항 후 첫 번째 한 일은 안전교육 수강. 비상벨이 울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카드에 적힌 교육장소로 집합해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 교육의 요지였다.

기대를 했던 식당은 배의 14층에 있었다. 치킨·생선·스테이크·샐러드 등 세계 각국 음식과 빵·과일·아이스크림 등 디저트가 가득했다. 7성급 호텔 뷔페 수준으로 모든 음식이 입에 딱 맞았다. 식사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지만 대부분 비슷한 시간에 모였다. 식수와 생활용수는 바닷물을 정제해 쓰기 때문에 무한리필이다. 

도시의 각종 편의·오락시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800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실내극장, 수영장이 딸린 야외극장, 스파& 피트니스센터, 바& 레스토랑, 라운지 홀, 면세점, 카지노, 성인용 안마시설, 9홀 퍼팅코스, 헤어뷰티 살롱, 온천 등. 대부분 무료이거나 이용료가 저렴했다. 모든 종류의 술이 5달러다.

크루즈 여행은 오전 10시 경 배에서 내려 기항지의 관광지를 돌아보고 오후 3시 경 승선한다. 배는 밤사이 이동해 다음 기항지에 도착해 똑같은 일정을 반복한다. 크루즈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무거운 짐을 꾸리거나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기자는 공교롭게도 세월호 사고 직후에 크루즈를 탔다. 당시 사회적으로 크루즈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자랑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6년여 만에 또다시 크루즈가 찬밥신세가 됐다. 그렇지만 크루즈 여행은 노인, 휠체어에 의지하는 이들에게 가장 최적화된 세계여행 수단 중 하나다. 이번의 불행한 사태로 인해 그런 메리트마저 무시당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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