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정년퇴직은 나라에서 주는 상이다
[백세시대 / 금요칼럼] 정년퇴직은 나라에서 주는 상이다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20.02.21 14:22
  • 호수 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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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정년퇴직하면서

지갑 얇아지고 삼식이가 됐지만

짝꿍이랑 종일 있는 것도 좋아

열심히 일한 당신

이젠 좀 실컷 놀아봐요

남편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언제 어디서든 공짜로 맘껏 지하철을 탈 수 있는 만능 쿠폰 하나 달랑 손에 쥐여주고는, 더는 회사에 나오지 말란다. 소위 말하는 정년퇴직을 당한 게다. 아직도, 몸을 쓰거나 머리를 쓰거나 무슨 일을 하더라도 청년들 못지않은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자신감은 충만하건만 인제 그만 뒷방에서 쉬란다. 

이해는 하겠다. 해마다 팔팔한 청년들은 사회에 쏟아져 나오건만 그들이 일할 곳은 이미 만석. 전쟁 후 태어난 베이비부머들이 곳곳에 포진해있는 탓이다. 한때는 우리나라 경제를 쥐락펴락 주름잡았던 1955년부터 1963년생들. 이제 슬슬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가 됐는가.

공장에서 갓 출고되어 도로를 달릴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있는 새 차가 줄줄이 대기 중이니 40년 이상 주행한 차는 이쯤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맞을 거다. 그러니 아쉬워 말자. 앞뒤 보지 않고 쉬지 않고 달려왔던 세월. 벌써 40해를 훌쩍 넘겼다. 참 애 많이 썼다. 이제 쉴 때도 됐구나.

남편이 정년퇴직하고 나서 바뀐 게 몇 가지 있다. 월급통장에 꼬박꼬박 입금되었던 돈이 끊긴 것과 어쩌다 한 번씩 집에서 밥 먹다가 삼시 세끼를 집에서 하는 삼식이 남편이 된 것. 사실은 삼식이가 아니라 삼순이가 맞다. 

나이 들면서 남성호르몬이 감소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동안 몸을 옥죄고 강요해왔던 남자다움의 틀을 빼버려서인지. 어쨌거나 남편은, 사우나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편안해 보이고 푸짐하고 넉넉한 아줌마로 변신했다. 

지갑이 얇아져서 좀 아쉽긴 하지만, 밤이나 낮이나 같이 밥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영화도 보는, 늘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짝꿍이 생겼다는 게 난 참 좋다.

어차피 많이 사서 많이 먹으면 건강에도 해롭다 한다. 애들 다 키워 결혼까지 시켰으니 큰 돈 들어갈 일도 없고, 좋은 옷 명품 구두 입어보고 신어 보니 별거 아닌 거 다 알게 됐으니 더는 거기 돈 낭비할 이유도 없다. 덜 먹고 덜 쓰면서 검소하게 산다면 얇은 지갑도 별문제는 안 될 게다. 

행복이란 것이 성적순이 아니듯이 어차피 행복은 지갑 두께 순도 아니다. 먹고 싶은 거 눈치 보지 않고 맘대로 먹고, 원하는 시간에 마시고 싶은 만큼 맘대로 마시는 혼밥과 혼술. 참 편한 습관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같이 살면서 티격태격 싸우고 부대끼고 다듬어진 짝꿍이랑 같이 먹고 마시면, 눈치도 안 보고 원하는 시간에 맘껏 먹고 마시고 거기다가 혼밥이 갖는 외로움까지 없으니 이보다 좋은 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삼시 세끼를 다 차려야 되나? 혼자서는 쟁반에 대충 차려서 밥도 먹고 국수도 먹고 고구마도 먹고 대충 때우던 끼니를, 남편이 있으니 세끼 내리 상을 차려 내야 하나. 다 생각하기 나름. 늘 하던 대로 쟁반에 차려서 수저만 한 벌 더 놓으면 된다. 다만 남편 좋아하는 반찬 한두 가지 내어놓는 건 오랜 세월 밖에서 일한 사람에 대한 예의일 터.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남편. 그가 달라졌다. 쟁반도 들어주고 반찬도 덜어준다. 가끔 청소기도 돌려주고 빨래도 돌리고 같이 갠다. 돈을 벌지 못해 눈치가 보여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이 든 짝꿍이 안쓰러워 돕는 것일 거다. 

오래 같이 살아서 그런지 취향도 닮았다. 예전엔 정치 토크나 뉴스만 보던 사람이 요즘은 아침 막장 드라마에 푹 빠져있다.

‘아니, 저 X은 지가 바람 피워 놓고선 어쩜 저리 뻔뻔하냐. 아이고 저 착한 부인 불쌍해서 어쩌지.’

‘걱정 마. 저 여자가 좀 있으면 좋은 직장 얻고 돈 많이 벌어서 시원하게 복수해 줄 거야.’ 

‘전업주부로 있다가 갑자기 어떻게 좋은 직장을 얻고 돈을 벌어?’

‘따지지 마. 그런 게 있어. 막장에선 못 하는 게 없어. 갑자기 출생의 비밀도 나오고 어쩌면 친척 재벌 총수가 나타날지도 몰라.’

요즘 TV 앞에 앉아 진지하게 나누는 우리 부부의 대화다. 정년퇴직. 일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더는 돈 버는 일을 하지 않고 이제는 놀아도 괜찮다는 말인 게다. 그리 생각하면 정년퇴직은 나라에서 주는 개근상 정도 되려나. 

열심히 일한 당신. 어디 한번 실컷 놀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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