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몰래 돈 빼가는 ‘경제적 학대’ 막는다
어르신 몰래 돈 빼가는 ‘경제적 학대’ 막는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0.02.28 10:23
  • 호수 7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융위, 인출액 급증 등 이상징후 땐 은행원이 신고하는 체제 구축

80대 4명 중 1명, 본인 모르게 통장의 돈 빼앗기는 등 피해

[백세시대=배성호기자] #1. 2018년 8월, 인천에서는 치매에 걸린 이웃 어르신의 전 재산 3500만원을 가로챈 50대 A씨가 구속됐다. 어르신이 치매에 걸린 것을 알게 된 그는 비밀번호 재발급 명목으로 은행에 동행해 아들 행세를 했다. 직원을 속여 번호를 알아낸 후 기초생활수급비 등 전 재산을 갈취했다.

#2. 치매를 앓고 있는 80대 B어르신은 간병인에게 전 재산 5000만원을 빼앗겼지만 돈을 도둑맞은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장 볼 때 쓰라”며 통장과 인감을 내어준 게 화근이었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딸이 항의했지만 간병인은 “허락을 받고 정당하게 쓴 돈”이라 반박했다. 은행 예금거래 약관은 통장과 인감이 있고 비밀번호가 맞으면 돈을 지급하도록 돼 있어 은행에도 항의조차 못하고 결국 돈을 돌려받을 길이 요원해졌다. 

최근 가족과 지인, 간병인들이 노인의 돈을 갈취하는 일명 ‘경제적 노인학대’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는 가운데 금융위원회가 고령층 금융거래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올 하반기까지 ‘금융착취 방지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혀 주목받고 있다.  

‘경제적 노인학대’란 고령자의 재산을 다른 사람이 부적절하게 이용하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며 ‘금융착취’라고도 한다. 모르는 사람이 저지르는 보이스피싱‧사기뿐 아니라 가족‧간병인‧재무관리인 등 지인에 의한 재산 편취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경제적 학대’ 피해는 연령별로는 80대(23.9%), 성별로는 여성(72.7%)에게서 가장 많이 발생한다. 가해자는 아들(60.4%), 딸(10.8%), 배우자(9.4%), 가족이 아닌 타인(5.8%) 순이다. 문제는 경제적 노인학대의 피해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후 파산’ 중 일부도 금융착취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법원이 파산선고를 받은 70대 노인의 카드 사용내역에서 백화점 명품 쇼핑, 사업장 국세 납부, 외제차 구입 등이 발견돼 면책(빚 탕감)을 불허한 사례도 있다. 자녀들이 부모 명의의 카드를 쓰고 갚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시장연구원 신경희 연구원은 “노인들이 인지기능이 저하돼 착취당한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가족이나 지인을 신고하길 꺼리는 경우가 많다”며 “이러한 까닭에 당국의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례 역시 많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미국 등에서도 이에 대한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2018년 시니어 안전법을 제정했다. 은행이 노인에 대한 사기 의심 거래가 발견되면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도록 법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일부 주에서는 해당 거래에 대해 은행원이 처리를 거절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다. 

금융위가 구상 중인 경제적 노인학대 방지방안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는데 첫 번째가 ‘고령층 착취 의심거래 감시시스템’을 도입이다. 비활성계좌의 거래 재개, 인출액 급증, 주소 변경 등 이상징후를 전산망에서 사전에 잡아내는 방식이다. 

‘거래처리 지연·거절·신고체계’도 구축한다. 금융회사 직원이 의심거래를 당국에 신고하고, 자금 인출을 미룰 수 있게 하는 제도다. 거래 내용을 외부에 알려도 민·형사상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면책특권을 준다는 구상이다. 사후모니터링 차원에서 ‘제3자에 의한 고령자 거래내역 모니터링’ 도입도 준비 중이다. 사전에 인증받은 가족이나 친지 등이 고령자 계좌의 거래내역을 확인하도록 해 피해를 줄인다는 것이다. 

금융위는 업계 의견 수렴을 거쳐 올 하반기 세부방안을 확정하고, 별도의 법 제정을 추진할 계획이다

금융위는 이와 별도로 고령층 중에서도 저소득저신용자에게 불완전판매를 하는 금융회사는 가중처벌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인터넷·모바일뱅킹 접근을 돕기 위해 ‘고령자 전용 모바일금융 앱’을 개발할 예정이다. 또 주택연금 가입자가 치매보험에 들면 할인 혜택을 주는 등 고령 특화상품 출시를 유도하기로 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한국도 미국의 법제화 사례를 참조해 금융착취 대비책을 선제적으로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