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인생의 오후를 위한 구상
[백세시대 / 금요칼럼] 인생의 오후를 위한 구상
  • 김동배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명예교수
  • 승인 2020.02.28 14:06
  • 호수 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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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는 신체적 쇠퇴기지만

삶을 잘 계획해 실행한다면

가장 축복받는 시기일 수 있어

진정 하고 싶었던 일이나 취미

즐기며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

고령사회가 도래하면서 노년기를 어떻게 하면 잘 지낼 수 있겠느냐 하는 질문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건강하고, 재미있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묻는 것이다. 대학에서 노인복지학을 강의해온 필자는 최근 출간한 졸저 「백세시대 시니어로 살기」에서 어느 정도 그 해답을 추구하였다.

생애 발달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인생을 여러 단계로 구분하는데 나는 크게 네 단계로 나누는 걸 선호한다. 제1의 인생은 부모의 양육과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하는 시기이다. 대략 30년이다. 제2의 인생은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려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시기이다. 여기도 대략 30년, 인생의 확대기이다. 제3의 인생은 자녀를 출가시키고 직장에서도 퇴직하며 본인이 갖고 있었던 자원을 하나씩 잃어버리게 되는 시기이다. 여기도 또 대략 30년, 인생의 축소기이다. 마지막으로 제4의 인생은 질병과 의존성이 높아지고 죽음을 대비해야 하는 시기다. 사람에 따라 그 기간은 천차만별이다.

제3의 인생은 신체적으로 쇠퇴하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시기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계획하고 실행하기에 따라 인생의 가장 축복받는 시기일 수 있다. 이 시기는 사회적 책무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면서 평생 진정 바라왔던 일이나 취미를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원하는 것을 추진할만한 정도의 건강을 갖고 있다면, 삶의 경륜을 통해 인생을 달관하면서도 젊은이 못지않게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노년기의 풍요로운 삶이란 세상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폭이 넓어지고, 친구와 이웃 관계를 즐기는 원숙함이 깊어지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그 위에 학습과 봉사를 통해 잠재력을 개발하고 사회활동을 유지함으로 삶의 진정한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래서 건강, 소득, 인간관계 등이 약화되고 축소되어 젊은이에 비해 불행해 보이는 노인이 실제는 더 행복하고 감사해 하는 현상을 ‘노화의 역설’(paradox of aging)이라 부른다.

이런 현상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드니 세월이 이렇게 빨리 흐른다고 당황하고 허탈해하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하는 것을  희망 속에 계획하고 실행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20세기 최고의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은 “인생의 오전을 위해 만든 프로그램으로 인생의 오후를 살 수는 없다”라고 갈파하였다. 그러니까 인생 오전의 성공적 삶은 목표를 정하고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인데 반해 인생 오후의 성공적 삶은 노화 과정에서 상실하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자원을 지혜롭게 활용해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노년기의 새로운 프로젝트! 내가 좋아하는 일, 의미를 둘만한 일, 알고 보니 평생에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 그런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다.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스스로 만족하며 대견해하는 일이다. 남들이 인정해주면 좋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그래서 이것은 잘했다고 칭찬받지도 않고 잘못했다고 꾸중 듣지도 않는 일이다. 이런 일들은 아마 어릴 때의 경험이나 기억과 관련될 가능성이 많다. 어릴 때 어떤 이유에서 충분히 즐기지 못했기 때문에 쌓인 불만족이 ‘未完의 관심사(unfinished business)’로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어서 한 번은 꼭 해봐야 하겠다는 충동이 작동되는 것이다. 때로 이것은 이웃과 세상에 기여하는 것으로 승화되어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년기엔 ‘사회적 자아(social self)’를 버리고 ‘내면의 자아(inner self)’를 찾아야 한다. 인생 오전에 내가 노력했던 일들은 내가 좋아하기보다 사회가 정해 놓은 표준에 따라 살면서 인정과 칭찬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생 오후에는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조용한 그러나 분명한 음성에 호응하게 된다. 죽기 전에 이것은 꼭 해보고 싶다고…. 이것을 버킷 리스트(bucket list)라고 한다. 

내면의 자아를 찾기 위해 몇 가지 수행과제가 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에 대한 자족, 주위에 존재하는 친근한 사람과 사물에 대한 감사,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에 대한 경외, 이전 세대에서 후 세대로 연속되는 과정에 존재하는 나의 삶에 대한 의미, 신비와 경이로 가득 찬 자연 질서와의 조화, 그리고 인생에 제한을 둔 신의 뜻을 이해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젊은이의 영성이 분투하고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면 노인의 영성은 머물고 즐기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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