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에 나오지 않는 조선왕조이야기 4] 왜란 때 임시조정 이끈 광해군… 종기 탓에 죽은 효종
[사극에 나오지 않는 조선왕조이야기 4] 왜란 때 임시조정 이끈 광해군… 종기 탓에 죽은 효종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0.03.06 15:34
  • 호수 7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해군부터 현종까지

광해군, 선조 대신 의병 참전 독려 등 활약… 대동법 시행 등 업적 남겨

15년 간 재위했던 현종은 병 때문에 이렇다 할 업적 없이 ‘예송논쟁’만

2013년 JTBC에서 방영된 ‘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에서 인조를 연기한 이덕화가 극중 삼배구고두례를 연기하는 모습.
2013년 JTBC에서 방영된 ‘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에서 인조를 연기한 이덕화가 극중 삼배구고두례를 연기하는 모습.

[백세시대=배성호기자]임진왜란 초기 관군의 방어선이 뚫리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을 재촉했고, 이것은 백성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줬다. 이에 비해 광해군은 18세 나이에 왕세자로 임명돼 분조(分朝·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임시조정)를 이끌며 의병 참전을 독려하는 등 위기에 큰 활약을 했다. 즉위한 이후에도 전쟁 중에 황폐해진 토지의 회복과 민생 부담을 덜어주는 데 공을 들였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를 전쟁 전 상태로 회복하는 데 주력하는가 하면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해 백성들 부담을 줄였다.

16세기 이후 사회적으로 가장 큰 문제였던 공납제(貢納制·특산물을 세금으로 바치는 제도)를 개혁한 대동법은 기존에 가호(家戶)별로 부과하던 세금을 토지에 부과한 제도다. 대동법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땅이 많은 양반 지주의 부담은 증가한 반면 일반 서민들 부담은 크게 줄어들었다. 

반대 세력에 대한 정치적 숙청과 ‘폐모살제’(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것, 인조반정의 명분이 됨)라는 그림자가 있지만 광해군은 전쟁의 상처 회복과 대동법 실시, ‘동의보감’ 간행 등 업적을 남겼다. 국제 감각을 통해 추구했던 실리외교 역시 재평가받고 있다. 

인조반정을 통해 즉위한 인조는 알려졌다시피 쇠퇴하던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려다 후금(청나라)을 홀대하는 바람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어야 했다. 결국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림)’의 항복 의식을 치른 삼전도의 치욕을 겪어야 했다. 그 결과 많은 신하들과 왕자들이 인질로 붙잡혀 가게 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전쟁이 종결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청나라에서 인조가 항복한 삼전도에 ‘대청황제공덕비’(삼전도비)를 세울 것을 요구해온 것. 비록 백기를 들었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여전히 청나라는 오랑캐로 여겨 누구도 비문을 지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조는 마지못해 당대 문장으로 일가를 이룬 장유, 조희일, 이경석 3인에게 글을 쓰라 했고 이 가운데 장유와 이경석의 글을 청나라 조정에 보낸다. 결국 청나라에서 이경석의 글이 낙점돼 삼전도비에 새겨지게 됐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왕위에 오른 효종은 재위 기간 내내 북벌(北伐)을 추진했다. 효종은 강제로 끌려간 심양 생활에서 조선인 포로의 비참한 생활을 직접 목격했다. 

또 청 황제를 따라 수렵에 나서면서 중국의 사정과 지형도 면밀히 관찰했다. 이런 경험과 부왕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효종은 북벌을 추진했지만 허망하게도 그의 야망은 ‘종기’ 때문에 끝이 난다.

“임금의 얼굴에 종기의 독이 퍼졌다. 의원 신가귀의 처방에 따라 임금이 침을 맞았는데 피가 그치지 않고 솟아나왔다. 침이 혈락을 범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그만 승하하고 말았다.”

1659년(효종 10년) 5월 4일, 효종의 급서(急逝)를 알리는 실록의 내용이다. 의원 신가귀의 침이 그만 임금의 혈맥을 찌르는 바람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신가귀는 이 의료사고 때문에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현종(재위 1659~1674년)은 재위기간이 짧지 않은 편이지만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고, 유례없는 자연재해와 대기근으로 제대로 정사를 펼칠 수 없었다. 특히 당쟁이 워낙 치열해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않은 존재감이 없는 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얘기할 때 반드시 거론 되는 것이 ‘예송논쟁’이다. 

조선 시대에 성리학의 예법을 어떻게 풀이할지를 두고 학자와 정치인들이 벌인 논쟁으로 “왕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 어머니나 시어머니인 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는 것이 알맞은가?”였다. 예송논쟁은 학문적 논쟁인 동시에 지금의 여당과 야당이었던 서인과 남인의 권력 다툼이기도 했다.

예송 논쟁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첫 번째 논쟁은 현종의 아버지인 효종이 죽자 그 어머니인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일어났다. 서인은 효종이 조대비의 둘째 아들이므로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가 정리한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법(주자 가례)’에는 장자가 죽었을 경우, 부모는 3년 동안 장례의 예를 갖춰야 하고, 차남 이하는 1년간 해야 한다고 돼 있었다. 그러나 남인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임금이 되었으므로 장남과 같이 대우해 3년(만 2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조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은 1년으로 결정됐고 논쟁에서 승리한 서인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다.

두 번째 논쟁은 현종이 임금이 된 후에 효종의 왕비였던 인선왕후가 죽자 시어머니인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벌어졌다. 주자 가례에는 첫째 며느리의 경우는 1년, 둘째 며느리에게는 9개월간 장례의 예를 치르도록 하고 있다. 서인은 인선왕후가 조대비의 둘째 며느리이므로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 9개월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남인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도 임금이 됐으므로 장자로 대우해야 하며, 인선왕후에게도 장자의 며느리에 해당하는 예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에서는 조대비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논쟁에서 승리한 남인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