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4월에 생각나는 사람 / 이동순
[백세시대 / 금요칼럼] 4월에 생각나는 사람 / 이동순
  • 관리자
  • 승인 2020.03.27 14:20
  • 호수 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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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사 전속작곡가 탁성록은

‘글루미 선데이’ 번안해 직접 노래

그 노래의 음울한 분위기처럼

탁성록은 마약에 취해 이상행동

제주 양민학살에 가담해

탁성록(卓聖祿, 1916~?)은 경남 진주 출생의 작곡가입니다. 레코드사에서 자주 음반 기획과 제작에 참여하다 보니 간혹 작사도 하고 드물게 가창(歌唱)으로 음반취입까지도 시도했던 흔적이 보입니다. 1930년대 콜럼비아레코드사 전속작곡가로 활동하던 시절에 발표한 가요작품은 10여 편이 넘지만, 히트곡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가 대중음악계에 끼친 공적으로 유일하게 평가되는 것은 고향 후배 강문수(남인수)의 재능을 진작 발견하고, 1935년 시에론레코드사의 전속작곡가 박시춘에게 추천해서 가수의 길로 인도한 일입니다. 

주 장르가 작곡 쪽이었던 탁성록은 1937년, 뜬금없이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음반을 하나 발표합니다. 제목은 ‘어두운 세상’(팽환주 작사, 문예부 작곡, 탁성록 노래, 리갈 째즈송, 1937). 이 노래의 원곡은 1933년에 나온 그 유명한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입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번안 가요가 원곡보다 4년 뒤에 나온 것이지요. 하지만 이후 탁성록의 삶과 경로를 살펴보면 그것은 그다지 축복할 만한 일이 되지 못했습니다. 

일본을 통해서 유입된 ‘글루미 선데이’의 음원을 처음 들어본 탁성록은 자신의 낙망, 좌절감, 열패감, 상실감을 쓰다듬고 위로해주는 묘한 효과를 느끼면서 단번에 이 노래에 몰입되고 심취해버린 듯합니다. 원곡 ‘글루미 선데이’의 출현 배경과 이후의 경과에 대해 잠시 알아보기로 합니다. 이 노래엔 우선 ‘저주의 노래, 죽음의 노래’란 불길한 명명이 늘 따라다닙니다. 

1999년에 제작 개봉된 영화 '글루미 선데이'는 1933년에 발표된 한 옛 가요 ‘글루미 선데이’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진 영화이지요. 원곡 가요는 시인과 피아니스트의 합작으로 만들어졌는데 작품에 내재된 어떤 허무주의적, 퇴폐주의적 음울한 기운 때문에 전 세계 수백 명의 청년으로 하여금 자살로 빠져들게 한 몹시 무섭고 뒤숭숭한 전설이 따라다닙니다. 구체적으로는 무려 187명이 이 노래 때문에 자신의 삶을 죽음의 수렁으로 몰고 갔다고 하네요. 

탁성록의 노래 ‘어두운 일요일’의 분위기는 유난히 어둡고 불안한 기류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 음반 취입 당시 탁성록은 이미 모르핀중독 상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약의 기운이 고갈된 상태에서 그는 녹음실 마이크 앞에 섰을 것입니다. 결국 탁성록은 내지 말았어야 할 음반을 분별없이 취입했습니다. 이 불길하게 흐느적거리는 감성과 병적 기운으로 충만한 음반은 식민지 시대 후반기를 살아가던 대중들의 지치고 곤비한 심신을 더욱 힘들고 고통스럽게 억압하고 불편한 심리적 부담을 주었습니다. 

진짜 괴롭고 힘든 문제는 음반 ‘어두운 일요일’ 발표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마약중독자 탁성록의 존재는 이후 콜럼비아레코드사 주변에서 아주 사라지고 세인들의 관심에서조차 지워졌습니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민족해방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의 아편중독 상태에서 조금씩 재활의 몸부림을 치면서 오래도록 방치해 두었던 악기에 먼지를 털었습니다. 모처럼 연주 활동도 펼치며 옛 동료를 모아 새로 악단까지 꾸렸습니다. 그가 꾸린 조직의 이름은 ‘탁성록경음악단’. 이 무렵 그에게 뜻밖에도 놀라운 제의가 찾아듭니다. 그것은 1945년 조선해안경비대의 군악대를 새로 조직해서 이끌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탁성록은 조선해안경비대 군악대 창설에 참여한 경력을 바탕으로 이후 국방경비대 대위로 특채가 되었지요. 군악대장으로 승진하여 활동을 하다가 이어서 1948년 6월, 제주도 4.3 격동의 현장으로 파견되어 국방경비대 제9연대 정보참모로까지 신분 상승을 거듭했습니다. 

이때 탁성록의 나이 불과 30대 후반, 피비린내 가득한 살육 현장으로 들어가서 그동안 몰래 감추어두었던 무시무시한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제주도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막강한 권력을 폭력적으로 남용하여 헤아릴 수없이 많은 양민이 탁성록이라는 못된 악마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살인적 악행이 마약중독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아편을 맞아서 기분이 몹시 들떠 있을 때는 눈에 띄는 미모의 여성을 마음대로 끌고 가서 강간을 했습니다. 반대로 아편의 약 기운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때 휘몰려오는 불안감, 불쾌감을 억제하지 못하고 완전히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서 제주도민들을 마구 총살하고 시신을 불태웠던 것이지요. 

우리는 이 무렵 악마 탁성록의 잠재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어떤 불길한 저주의 기운, 죽음의 기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야수적 만행에서 우리는 그가 그토록 심취하고 몰입해서 번안 가요까지 만들었던 ‘글루미 선데이’, 즉 ‘어두운 일요일’의 음습한 귀기(鬼氣)와 살기(殺氣)를 발견하고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원곡 ‘글루미 선데이’ 한 곡의 출현으로 여러 사람이 죽음으로 떨어져 버렸지요. 그런데 식민지 조선에서 한 대중음악인이 다시 이 불길한 노래에 깊이 빠져서 자신의 영혼을 죽이고, 급기야 타인의 소중한 목숨까지 죽음터로 휘몰아 넣었던 것입니다. 노래 하나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또 집단으로 죽이기도 한다는 무서운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그래서 4월은 우리에게 더욱 잔인한 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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