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기고] 87세 노 주방장의 행복
[백세시대 / 기고] 87세 노 주방장의 행복
  • 임종선 수필가 ‧ 시인
  • 승인 2020.04.03 13:52
  • 호수 7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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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쌀을 솥에 넣은 다음 물은 손등까지 오르도록 하면 적당하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필자는 십리 밖 농토로 일을 하러 가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저녁밥을 짓곤 했다. ‘어린 주방장’을 위해 어머님이 알려주신 맛있는 밥 짓는 요령은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보리쌀 씻는 일부터 시작되는 부엌일은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어느 순간 몸에 완전히 익었다. 나이가 어렸기에 짜증도 내고 게을리할 법도 했지만, 부모님께 작은 도움이 된다는 믿음 때문인지 즐거운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밥 짓는 요령을 알려주고, 고사리손으로 지은 밥을 흐뭇하게 드시던 어머니는 광복 직후 당시 유행했던 ‘큰마마’(병증이 심한 상태의 천연두)로 고생하시다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아버지가 지극 정성으로 돌봤지만 소용없었다.

어린 주방장은 점점 노련해졌지만 어머니가 떠나신 이후 아버지와 우리 사남매는 한국전쟁과 흉년 등의 풍파를 겪어야 했다. 다행히 새어머니가 가족의 빈틈을 메웠고 사남매는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현재는 손주와 함께 생활하며 행복한 노년을 살아가고 있다. 필자는 문인의 꿈을 이루고자 대학교 사회교육원 문예창작과정을 수료하고, 수필과 시조로 각각 등단했다. 늦은 출발이었지만 문학활동에 심취하면서 여생을 보람 있게 보내고 있다.

낮과 밤이 반복되듯 행복이 있다면 불행도 따라오는 법이다. 필자의 불행은 건강을 잃은 것이다. 20년 전 앓고 있던 간경화가 간암으로 발전하면서 현재까지 꾸준히 방사선 치료 등을 받고 아내 역시 필자와 비슷한 시기에 좌측 뇌경색을 앓고 있다가 얼마 전 우측 발목 관절염 수술을 받았다. 아직까지도 회복이 되지 않아 휠체어와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다. 아내가 온전히 설 수 없는 상황 때문에 ‘8학년 7반’의 필자는 다시 주방에 서게 됐다. ‘물은 손등까지만’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되뇌면서 매일 식사를 만들고 있다.

주방장은 식당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중책으로, 보수도 가장 많이 받는다. 식당에서 존경받는 직업이지만 필자와 같은 80대 노 주방장은 다르다. “밥이 무르다” 또는“덜 됐다” 등 아내의 짜증이나 투정 등을 위로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밥이 설사 설익었더라도 어머니께서는 꾸중보다는 오히려 고생했다고 위로해 주셨다. 어린 주방장 역시 부모님을 도왔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타박을 위로로 삼아야 하는 노 주방장의 현실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어쩌면 아내의 입맛에 맞을까 노심초사하는 노 주방장의 현실이 행복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내가 건강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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