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또 이렇게 봄날은 간다 / 엄을순
[백세시대 / 금요칼럼] 또 이렇게 봄날은 간다 / 엄을순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20.04.17 14:17
  • 호수 7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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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한 난리통에도

벚꽃은 활짝 피었다 지고 있어

겨울옷 죄다 꺼내 입어보고 

짧은 치마에 하이힐까지 신고

‘방콕 스트레스’ 풀어도 보고…

내겐 비밀스러운 자기가 하나 있다. 유명한 장인이 만든, 우윳빛의 커피용 도자기 머그잔이다. 십 년은 족히 넘었으려나. 큰맘을 먹고 보통 흔한 머그잔의 20배가 넘는 가격을 주고 산 머그잔. 십 년 동안이나 ‘꽉 쥐면 깨질라, 느슨하면 놓칠세라’ 아침마다 애지중지하며 커피를 담아 혼자 즐기고 있다. 일종의 명품 컵이다.

남들이 알아주기를 원해서 로고가 밖으로 드러난 명품을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렇게 남몰래 혼자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요즘 만드는 명품은 로고를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한다. 나 같이 자기만족을 위해 명품을 사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지난주 아침이었던가. 바로 그 머그잔에 커피를 담아 마당을 서성이며 ‘이 생각 저 생각’ 하고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작약도 한 뼘쯤은 머리를 디밀고 나왔어야 하거늘, 손톱만큼 얼굴을 내민 채 ‘나가도 되나’ 눈치만 보고 있다.

코로나19 난리 통에, 저 혼자 피처럼 빨간 꽃을 피우기가 꽤 미안했나 보다. 어느새 벚꽃 이파리 하나가 컵 안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위를 쳐다보니 온통 새하얗다. 아직 겨울옷 정리도 못 했는데 어느새 봄이라고 벚나무는 봉오리를 활짝 열어 주었구나. 고맙기도 하지.

코로나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 탓에, 꽃을 피운 벚나무에 그동안 눈길 한 번 주지 못한 것이 갑자기 미안하고 송구했다. 생각 난 김에 겨울옷을 죄다 꺼냈다. 과거에 입던 옷이며 신발이며 구두까지. 

언제 이런 옷을 입었었나 싶은 만큼 짧은 치마며 훌러덩 파인 옷이며 빨간 하이힐까지. 불어난 몸 때문에 잘 들어가지도 않는 치마를 억지로 쑤셔 입고 하이힐까지 신고는 집안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내게도 젊음이 남아있었나. 팔팔한 생기까지 느껴진다. 남편은 이해 못 하겠다는 눈치다. 

‘이거?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한 방콕(방안에서 콕)에서의 스트레스 푸는 새로운 방법이야.’ 

‘별스럽기는. 그런데, 난 항상 궁금한 게 있어. 여자들은 왜 야한 옷을 입고 다니는 거야? 남자에게 관심 끌어서 성적 어필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니다.  

‘절대 아니야. 내가 좋은 머그잔에 커피를 담아 혼자 살포시 즐기고, 아무런 로고도 없는 명품 배낭을 신이 나서 등에 메고, 보는 사람 없는 방구석에서 하이힐에 미니스커트 입고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다 자기만족인 거지.’

여자가 야한 옷을 입었다고 해서 ‘나 좀 건드려 주세요’가 절대 아니라는 것. 성희롱 예방을 위해 남자들은 이 말만은 꼭 명심할 필요가 있다. 여자가 화장을 예쁘게 하고 옷을 신경 써서 입는 것이 모두 다 남자에게 잘 보이려는 행동인 것으로 착각하는 남자가 많다. 물론 잘 보이고 싶은 남자가 있으면 그이 앞에서야 그럴 이유가 충분하겠지만 대부분은 내 자신감과 자존감을 키워서 나 자신이 만족하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며칠 동안 옷 서랍 전부 꺼내 패션쇼도 해보고. 그래서 아직도 내가 싱싱하고 살아있다는 걸 확인까지 해보고. 그렇게 ‘방콕’에서 원 없이 놀았건만 아직도 집에서 놀아야 할 날들이 더 남았단다. TV만 틀면 나오는 말. ‘될 수 있으면 외출을 삼가라.’ 종일 냉장고 구석구석을 정리하여 냉장고 파먹기도 해보고, TV에서 공짜 영화랑 드라마를 토끼 눈이 되도록 보기도 하고. 

방구석에서 뒹굴뒹굴 놀다 보니 어느새 벚나무가 하나둘씩 꽃 이파리들을 바닥에 떨구고 있다. 아니 봉오리 연지 일주일밖에 안 되었는데 그새 지는 건가. 관심을 두지 못했더니 심통이 났나 보다. 

바람 따라 떨어지는 꽃 이파리. 작년에는 화사한 꽃비로 보이더니만 오늘은 웬일인지 서러워서 뚝뚝 떨구는 눈물만 같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더니 봄이 왔어도 도무지 봄 같지가 않구나.

떨어지는 꽃잎이 서러워서 메밀차 한잔 들고 밖으로 나갔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꽃 이파리들. 움직이면 행여 밟을까 싶어 가만히 서서 차 한 모금 마셔본다. 장미가 꽃망울 열기 전에는 이 코로나도 가겠지. 또 이렇게 봄날은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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