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24] 축적의 시간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24] 축적의 시간
  • 장유승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 승인 2020.04.24 14:02
  • 호수 7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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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의 시간

평소 눈앞에 없어도 견디기 어려운데

더구나 남쪽 바다에 홀로 갇힌 신세라네

아비와 아들이 요사이 액운을 만났지만

잠깐 동안의 걱정이니 말할 것 없네 

 

平居睽外尙難堪 (평거규외상난감)

況此孤囚瘴海南 (황차고수장해남)

父子年來罹厄會 (부자년래리액회)

暫時憂惱不須談 (잠시우뢰불수담)

-정온 (鄭蘊, 1569~1641), 『동계집(桐溪集)』 권1 「돌림병을 피하여 산사(山寺)로 가는 시아(詩兒)를 전송하다.[送詩兒避疫之山寺]」


정온이 아들 정창시(鄭昌詩)에게 보낸 시다. 당시 정온은 제주도에 유배 중이었고, 정창시는 산사에서 피접(避接) 중이었다. 피접은 전염병을 피해 거처를 옮기는 것이다. 피우(避寓)라고도 한다. 당시로서는 유일한 전염병 예방책이었다.

평소에도 아들이 눈앞에 없으면 불안한데, 아버지는 외딴 섬으로 유배가고 아들은 전염병을 피해 산사로 올라간 처지이니 더욱 불안하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을 위로한다. “지금 우리의 불행은 잠깐 동안의 걱정에 불과하다.” 곧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말라는 뜻이다. 유배와 피접은 여러모로 닮았다. 원치 않는 객지 생활이라는 점,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점, 그리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고, 가족과 친구를 만나기도 어렵다. 수시로 죽음의 공포가 엄습한다. 이런 생활이 끝없이 이어진다.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

유배와 피접은 정체(停滯)의 시간이다. 세상은 잘 돌아가는데 나만 멈춰선 것 같다. 미래가 암담하니 현실의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도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 일쑤다. 이러니 유배와 피접은 버리는 시간이 되기 쉽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정체의 시간을 ‘축적의 시간’으로 삼았다. 타인과의 단절을 내면으로 침잠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들은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흔들리지 않고 미래를 준비했다.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19년의 유배기간 내내 두보(杜甫)의 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전집을 무려 2천 번이나 읽었다고도 한다. 그가 ‘조선의 두보’로 일컬어진 이유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방대한 저술 『여유당전서』가 18년 유배생활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정약용 역시 유배에서 풀려난 뒤 18년을 더 살았다. 비록 정계에 복귀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저술 작업은 계속되었다.

피접은 길어야 몇 달이니 좀 쉬어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오건(吳健, 1521~1574)은 『중용(中庸)』 한 권만 들고 시골집으로 피접 갔다. 무려 1만 번을 읽었다. 그는 퇴계조차 인정한 『중용』의 대가가 되었다. (중략)

코로나19 사태로 모두의 일상이 정지 상태다. 이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냥 끝나기만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것을 바이러스 탓으로 돌린 채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지금의 불행은 잠깐의 걱정일 뿐이라는 믿음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할 뿐이다. 그렇게 한다면 정지된 일상은 미래를 준비하는 축적의 시간으로 바뀔 것이다.    

장유승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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