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신간] ‘나의 할머니에게’, 여성 작가의 시선으로 살펴본 우리 할머니들의 삶
[화제의 신간] ‘나의 할머니에게’, 여성 작가의 시선으로 살펴본 우리 할머니들의 삶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0.05.15 16:05
  • 호수 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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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문학상 수상자 윤성희 등 6인 참여… 여성 어른의 존재성 조명 

가족 위해 희생하는 모습 담은 백수린의 ‘흑설탕 캔디’ 등 잔잔한 감동

신간 '나의 할머니에게'

[백세시대=배성호기자] 할머니. 사전적인 의미로는 ‘부모의 어머니’를 가리키지만 넒은 의미로는 노인이 된 여성 어르신을 지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할머니가 가진 의미가 남다르다. 현재 70~80대 이상 할머니들의 경우 남아선호 사상과 가부장제 아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오빠와 남동생에게 밀려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했다. 나라와 가정을 위해 헌신한 것에 비해 늘 저평가를 받아 온 것이다.

이런 할머니들의 삶을 여성 소설가들의 눈을 통해 재조명한 소설집이 출간됐다. 지난해 김승옥문학상을 수상한 윤성희를 비롯해 백수린, 강화길, 손보미, 최은미, 손원평 등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소설가들이 참여한 ‘나의 할머니에게’(다산책방)가 그것이다.

6편의 중‧단편을 모은 소설집은 그간 덜 주목받았던 ‘할머니’의 존재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빈곤, 고독사, 치매 등 노인 전체의 문제보다는 ‘여성 어르신’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여성의 삶을 들여다본다. 

권두에 실린 윤성희의 단편 ‘어제 꾼 꿈’은 혼자 살게 된 여성 노인 ‘나’가 남편 제사상을 더 이상 차리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매년 제사 전날 꿈에 찾아오던 남편은 그녀가 ‘제사 파업’을 선언하자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아들‧딸을 둔 홀애비와 결혼한 그녀는 마음으로 낳은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키웠지만 먼저 떠난 남편이 남겨준 아파트 처분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은 후 혼자 살고 있다. 드문드문 있었던 왕래마저 중단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씩씩하게 살아간다. 복지회관 셔틀버스를 타고 가 아쿠아로빅을 배우고 “언젠가 손주가 생기면 쓸 데가 있을 것”이라는 지인의 권유에 구연동화 수업을 듣는다. 종종 집 앞 유치원에 들러 아이들이 읊는 동시를 들으며 고독을 달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십여 년 전 돈문제로 자신의 남편에게 섭섭함을 느낀 후 사실상 절연했던 여동생이 손녀와 함께 찾아온다. 꿈에 형부가 나타나 사과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자매는 바르게 자라는 손녀의 귀여운 재롱을 함께 보면서 잊고 지냈던 감정을 되살리게 된다. 

이렇듯 ‘어제 꾼 꿈’은 독거노인으로 살던 주인공이 여동생의 꿈에 나타난 ‘남편’을 계기로 자매애를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온 손녀(이종 손녀)를 통해 혼자서도 씩씩한 척했던 자신이 사실은 돈 때문에 해체된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결국 아들이 낳은 자식의 할머니가 되고 싶음을 암시하며 마무리된다. 가족애를 복원하기 위해선 모성애가 필요하다는 것을 담고 있다.

반면 백수린의 단편 ‘흑설탕 캔디’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다 자신의 꿈과 사랑을 모두 포기해야 했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렸다. 작품 속 화자인 ‘나’의 할머니는 며느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아들과 손주들을 어쩔 수 없이 돌보게 된다. 그녀는 젊은 시절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까지 갔지만 끝내 사회적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하고 원치 않는 결혼까지 하게 된다. 이후 그녀의 삶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할머니들처럼 가족에게 철저히 종속된다. 남편이 죽고 난 후에야 겨우 자신만의 주체적인 삶을 살려고 했지만 결국 아들과 손주들에게 얽매인다. 여기에 더해 아들이 프랑스로 발령이 나면서 생각조차 한 적 없는 이국행을 하게 된다.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던 이국땅에서 할머니는 옆집에 혼자 사는 프랑스 노인과 연을 맺는다. 그리고 그의 피아노를 빌려 연주하고 난 뒤에야 누군가의 엄마, 할머니가 아닌 꿈 많았던 지난날의 자신을 발견한다. 대화는 통하지 않지만 외국인과 로맨스를 경험하며 새 삶을 사는 듯했다. 

하지만 아들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그마저도 무산된다. 작품은 끊임없는 할머니의 희생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이외에도 강화길의 단편 ‘선베드’는 요양병원에 입원한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손녀와 그녀의 친구의 하루를 다룬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게 될 손녀를 걱정했지만 치매로 손녀를 완전하게 잊어가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는 손녀의 두려움과 슬픔을 담담하게 그렸다. 마지막 수록작인 손원평의 ‘아리아드네 정원’은 지금의 20대가 노년이 되는 미래 사회를 서늘하게 그리며 현 세대에게 할머니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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