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소시민의 ‘작은 행복’
[백세시대 / 세상읽기] 소시민의 ‘작은 행복’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0.05.22 13:38
  • 호수 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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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맘껏 먹었다. 체리는 과거 바나나처럼 서민에게는 터무니없이 비싼 과일이다. 과일가게 한쪽에 귀하게 모셔져 있는 체리를 곁눈질만 하다가 며칠 전 수만 원어치를 구입해 원 없이 흡입했다. 긴급재난지원금 덕분이다. 만약 이 돈이 없었다면 언제 저 검붉은 색의 빛나는 서양열매를 원하는 만큼 섭취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긴급재난지원금을 몸으로 체험하기까지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평소 사용하는 카드사 홈페이지를 통해 재난지원금을 신청하자 순간적으로 화면에 2인 가구 60만원이 지급 된다는 글이 떴다. 가족 수 확인 과정도 생략한 채 즉석에서 지원금 액수가 산출되는 걸 보고 개인정보를 몽땅 털린 듯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하루 반 만에 핸드폰으로 60만원이 충전됐다는 문자가 왔다. 동시에 소시민적인 걱정과 온갖 상상이 뒤따랐다. 가장 우려되는 게 원래의 카드 기능에 지원금이 하나 더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카드 사용 시 과연 어떤 돈이 먼저 빠져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지원금으로 지불하고 싶은데 카드 결제가 되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식당 카드단말기에 지원금과 신용카드를 구분해 결제가 이루어지는 어떤 프로그램이 깔려 있을까, 주문하기 전 식당 주인에게 음식 값은 반드시 지원금에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주지시켜야 하는가 등등.

문제는 쉽게 풀렸다. 음식점에서 먼저 재난지원금을 받는 업소인지 확인하고 식사 후 카드를 내밀었다. 통상적으로 단말기에 카드를 긁자 바로 핸드폰에 문자가 떴다. ‘정부긴급재난지원금 사용금액 ○○○원 남은금액 ○○○원’. 

불안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안도의 숨이 나왔다. 공짜 돈을 쓰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70년 가까운 세월, 국가에 바치기만 했던 터라 받는 자체가 어색했다. 허탈감도 아니고 성취감도 아닌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국가가 이렇게 편의를 봐주었는데 그렇다면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애국심을 가져주어야 하는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긴급재난지원금을 써본 이들의 반응도 갖가지다. 어느 만화가는 지원금을 받자 생산성이 평소보다 높아졌다고 했다. 그는 지원금으로 평양냉면에다 평소 반접시만 시키던 수육을 한 접시 시켜 먹고 나자 지지부진하던 원고 진도가 쭉쭉 나기 시작했고 근사한 만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도 다시 생겼다고 했다. 

긴급재난지원금을 의미 있게 사용한 노인회도 있다. 전북 부안군지회는 지난 5월 15일, 지회장과 직원들의 재난지원금 일부를 모아 장학기금으로 내놓았다. 김종열 부안군지회장은 사비까지 보탰다고 한다. 김 지회장은 부안군 근농인재육성재단에 장학금을 전달하면서 “지역경제가 어려울수록 지역인재 육성을 위한 장학사업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더욱 절실하다”며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급되는 재난지원금이지만 이번 기금 전달이 더 많은 장학기금이 모아지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긴급재난지원금과 관련해 국가의 무분별한 현금 살포와 코로나19사태로 인해 한국경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을 것, 한국의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중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라는 등 전망이 어두운 기사들이 맘을 편치 않게 만든다. 경제 규모 세계 7위인 대한민국이, 국방 예산 50조원의 대한민국이 수조원을 지역경제 회복에 투입했다고 일부 남미국가들처럼 망가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긴급재난지원금으로 체리를 사먹던, 평양냉면을 사먹던, 장학금으로 내놓던 그것은 각자의 가치관과 소신, 판단에 달렸다.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상 처음 실시되는 국가적 경기회복정책을 두고 ‘국가부채 증가로 인한 한국경제 파탄’ 식으로 겁주지 말았으면 좋겠다. 소시민의 ‘작은 행복’을 잠시나마 부담감 없이 누릴 수 있게 긴급재난지원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더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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