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홍범도 무덤에 시집 ‘홍범도’를 바치다 / 이동순
[백세시대 / 금요칼럼] 홍범도 무덤에 시집 ‘홍범도’를 바치다 / 이동순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20.05.22 13:50
  • 호수 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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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독립운동가 조부의 정신 따라

홍범도 장군 대서사시 집필에 착수

20여년간 자료를 수집한 끝에 

홍범도 전집 10권 완성해

장군의 묘소에 바쳤던 기억 새록

지난 1983년, 나는 우리 민족의 영웅 홍범도 장군을 테마로 서사시 작품 쓰기에 대해 결심을 하고 자료 수집에 착수하였다. 이런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까지 엄청난 난관이 많았으나 오로지 나의 조부 일괴공(一槐公) 이명균(李明均, 1863~1923) 선생의 유촉(遺囑)과 격려에 힘입은 바가 크다. 

선조고(先祖考)께서는 1920년대 후반 경상도 지역의 독립운동 관련 사건이었던 대한의용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셨다. 그 과정에서 미결수로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가 혼수상태로 풀려났지만, 곧 돌아가셨다. 조부님 돌아가시고 17년 뒤에 내가 태어났으므로 나는 조부님을 뵌 적이 없다. 하지만 조부님께서는 몽매간에 모습을 나타내셔서 자손으로서의 할 일을 항시 깨우쳐 주셨다. 나는 바람결에 조부님의 말씀을 들었고,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조부님의 음성을 들었다. 문학을 창작하고 전공하는 후손에게 보내주신 조부님의 부탁은 오직 한 가지.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테마로 하여 한 편의 서사시를 장엄하게 엮어가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민족사의 많은 별 떨기들, 그중에서도 포수 출신의 전형적 민중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을 내 작품의 중심인물로 설정하게 되었다. 

이후로 어금니를 굳게 깨물고 비호같이 도서관으로 돌진하여 자료를 모으고, 창작의 구상과 상상력을 키우며 집필에 달려들 날만 기다렸다. 하지만 홍 장군의 생애와 행적에 관해서는 뜻밖에도 판에 박힌 듯 몇 가지의 사실 외엔 새로운 내용을 찾아내기 어려웠다. 오직 ‘홍범도’라는 한 가지 테마로 자나깨나 몰두하며 국내외를 떠돌아 세월을 보내기 어언 20여 년! 드디어 나는 2003년에 이르러 홍 장군의 생애를 총체적으로 정리한 서사시 한 편을 완성하였다. 

홍범도 장군의 위대성은 우선 일본군 부대를 괴멸시켰던 그 빛나는 전공(戰功)에서 시작되겠지만, 다시금 장군의 생애를 찬찬히 헤아려보면 홍 장군의 서민적 성품과 관련된 일화들에서 주로 발견된다고 하겠다. 

장군은 가난한 농민의 가정에서 출생하였고, 이후로 가정적 파란을 겪으면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의연함을 보였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사회의 주변이나 군대 조직의 내부에서 겪게 되는 것은 모순과 부조리였다. 홍범도를 성장시켰던 원동력은 바로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조국의 운명은 점점 고난 속으로 빠지게 될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하였고, 급기야 친일파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민족의 주적(主敵)이라는 판단에 도달하게 되었다. 

후치령 전투를 비롯하여 홍범도 장군이 관북의 산악지역에서 펼쳤던 일련의 눈부신 게릴라 활동은 오로지 일본이라는 민족의 적을 파괴하고 처단하기 위한 한 가지 목적으로 집중되었다. 당시의 일본군 정보자료를 살펴보면, 홍 장군에 대한 두려움을 일제가 얼마나 크게 가졌던가를 금방 알게 된다. 다음으로 홍범도 장군의 위대성은 온 가족(아내와 두 아들)을 조국 해방을 위한 독립전쟁에 헌납하고서도 그것을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결코 개인주의적인 혼란이나 갈등, 혹은 좌절에 휩싸이지 않고 더욱더 당당하게 모순과 부조리의 중심을 향하여 돌진하였다는 사실이다. 홍 장군의 위대성은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도 우뚝한 표상으로 부각된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는 민족사에 길이 빛나는 자랑스러운 무장 독립투쟁이었다. 

지난 2000년 겨울, 미국의 시카고 미시간 호수의 맹렬한 눈보라를 바라보며 작품의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의 놀라운 추억 한 토막을 소개하고자 한다. 밤을 새워 내가 쓴 작품의 완성본 초고를 읽고 또 읽어 고치고 다듬기를 거듭하느라 눈은 침침하고 온몸은 피로에 나른하였다. 그때 엄청난 눈발 속으로 누군가가 말을 타고 창밖으로 다가왔다. 언뜻 올려다보니 홍범도 장군이었다. 한순간 눈이 부셔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당신께서는 쏟아지는 함박눈을 그대로 맞으며 말 등에 앉아서 나를 한참 동안 다정한 눈길로 굽어보시더니 다시 말머리를 돌려 눈발 속으로 등을 보이고 터벅터벅 떠나셨다. 오랜 시간 작품 쓰기의 피로가 누적되어 비몽사몽 속에서 겪은 환시(幻視)였지만 참으로 놀랍고도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지난 2018년 10월은 나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시간이다. 탄생 150주기, 서거 75주기를 맞이해서 서울의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회원들과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의 고려인 공동묘지에 묻혀계신 홍범도 장군의 묘소와 동상을 찾아갔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나는 꽃다발과 함께 서사시 ‘홍범도’ 전집 10권을 바치었다. 장군의 무덤 앞에 무릎 꿇고 절 드리는데 나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감개는 끓어오르고 땅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국의 국회의원회관 대강당에서 홍범도 장군 탄생 1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장시 ‘신 유고문(新 諭告文)’을 낭송하였고, 카자흐스탄 알마티 고려극장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하여 장시 ‘아, 홍범도’를 낭송하였다. 고려극장에서의 시 낭송은 저자의 낭송 직후 동포 배우 김조야 씨가 러시아말로 번역된 시작품을 격정적으로 낭송하여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감격에 사무쳐 눈물을 흘리는 고려인 동포들이 여럿 있었다. 크질오르다와 알마티에서의 고려인협회 회원들과 만남은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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