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판화, 판화, 판화’ 전, ‘설치미술 같은데, 판화라고?’… 판화의 편견을 깨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판화, 판화, 판화’ 전, ‘설치미술 같은데, 판화라고?’… 판화의 편견을 깨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0.05.22 14:11
  • 호수 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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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는 판화에 대한 편견을 깨는 한국 현대 판화 작품의 대표작을 소개한다. 사진은 꽃, 나무 등 풍경을 목판화로 찍어 하나의 책으로 엮은 강행복의 ‘화엄’
이번 전시에서는 판화에 대한 편견을 깨는 한국 현대 판화 작품의 대표작을 소개한다. 사진은 꽃, 나무 등 풍경을 목판화로 찍어 하나의 책으로 엮은 강행복의 ‘화엄’

국내 현대 판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작가 60여명의 작품 100여 점

바느질로 엮은 ‘화엄’, 시대의 아픔 담아낸 ‘제주 4.3 진혼가’ 등 눈길

[백세시대=배성호기자] 판화란 나무‧금속‧돌 등으로 만든 판에 그림을 새겨 색을 칠한 후 종이 등에 찍어서 만든 그림을 말한다. 5월 19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들어선 순간 이 사전적 정의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전시장 한켠에 전시된 김구림 화백의 ‘걸레’ 때문이었다. 흰 식탁보를 덮은 직사각형 테이블 위에 걸레로 추정되는 갈색 꽃무늬 옷감과 유리컵을 올려놓은 작품으로 판화라기 보다는 일종의 설치미술처럼 느껴졌다. ‘걸레’는 실제로 1981년 열린 동아국제판화비엔날레에 출품했으나 여러 장 찍어내는 복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전시가 거부되는 등 국내 미술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걸레’를 비롯해 국내를 대표하는 판화 작품들을 통해 한국판화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다. 8월 16일까지 진행되는 ‘판화, 판화, 판화’ 전에서는 국내 현대판화 작가 60여명의 100여점을 소개한다.

판화는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독자적 특징을 지닌 장르이자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이번 전시는 판화에 대한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고 판화의 매력을 재발견하는데 주력한다. 거장들의 대표작을 연대기 순으로 보여주는 식상한 구조에서 탈피해, ‘책방’, ‘거리’,‘작업실’, ‘플랫폼’ 등 4개의 공간으로 나눠 ‘이런 것도 판화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작품들을 소개한다.

판화는 판에 새기고 종이에 찍어내는 특징 때문에 인쇄문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것은 판화를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비교적 가까운 예술로 만들어 주었다. 첫 번째 공간인 ‘책방’에서는 ‘책’이라는 형식을 작가의 작품으로 재해석한 판화 아티스트 북과 디지털 아트 등으로 책과 판화의 개념을 확장시킨 작품들, 판화 일러스트북과 그 원화들을 다채롭게 소개함으로써 판화와 인쇄문화의 접점을 살펴본다. 특히 눈길을 끄는 작품은 강행복의 ‘화엄’(2019)이다. 작은 것들이 엮이고 묶여 더 큰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꽃과 나무, 구름, 길 등 주변 풍경을 목판화로 찍어낸 뒤 바느질로 하나의 책으로 묶었다. 

판화는 복제와 배포가 가능하다는 점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는 특징 등으로 작가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확산시키는 일종의 미디어로 기능한다. ‘거리’에서는 1980년대 민중 목판화를 비롯, 현실의 사회적인 이슈를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판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이중 제주 4.3 사건을 주제로 홍선웅이 제작한 단색목판화 ‘제주 4.3 진혼가’(2018)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화면의 중앙 하단에는 1947년 제주 4.3 사건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제주도민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당시 항만으로 모여든 군함들, 경찰과 군인들의 행렬 모습, 전투 장면, 피난처로 이동하고 있는 제주도민들의 모습을 모두 하나의 화면에 담고 있다. 특히 망자의 넋을 달래준다는 의미를 지닌 꼭두인형을 등장시켜 사건을 지켜보는 증인의 역할과 바다에서 살풀이춤을 추며 무고하게 희생된 영혼을 위로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판화 작가들은 자신의 ‘작업실’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표현하고 확장시켰고 판화의 기법을 연구하고 발전시켰다. 세 번째 공간인 ‘작업실’에서는 타 장르와 구분되는 판화의 고유한 특징인 판법들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이영애 작가의 ‘내 날개 아래 바람 1’(1995)은 애쿼틴트 기법의 특징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가늘고 섬세한 선으로 작가가 주로 다루는 자연의 소재인 낙엽, 나뭇잎 등을 표현했다. 애쿼틴트는 동판화의 일종으로 동판을 부식시켜 요철을 만드는 에칭 기법 중 하나이다. 작가에게 고난도의 기술과 노동을 요구하기에 애쿼틴트를 주요 매체로 국내에서 작업하는 작가는 많지 않다. 이영애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애쿼틴트를 능숙하게 사용하여 세필로 그린 듯 치밀한 묘사가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플랫폼’에서는 동시대 미술의 장르 중 하나로서 확장된 판화의 면모를 만날 수 있다. 이중 강동주의 ‘커튼’(2018)은 4개월 동안 작가가 머물던 숙소 창밖으로 보이는 밤의 풍경을 기록한 61장의 판화 작품이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바라본 풍경이지만 매일 미묘하게 다른 얼굴을 만들어내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판화의 느린 호흡으로 표현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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