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덜 알려진 영웅들, 중공군 3개 사단에 맞서 2만명 사살한 임부택 장군
한국전쟁의 덜 알려진 영웅들, 중공군 3개 사단에 맞서 2만명 사살한 임부택 장군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0.05.29 15:20
  • 호수 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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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부택 장군
임부택 장군

김신 공군 중장, ‘F-51 머스탱’기 직접 인수해 공중전 승리 견인

재미교포 김영옥 대령, 혁혁한 전공… 작렬히 산화한 무명 용사도

[백세시대=배성호기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폭풍’이라는 작전명 아래 38선을 넘는다. 이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동족상잔의 비극’은 3년간 이어지며 한반도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민간인 24만 4663명이 사망하고 부상자와 행방불명자 등을 모두 포함하면 99만명이 희생된다. 또한 전쟁 기간 한국군 13만7899명, 유엔군 3만7902명이 전사·사망했다. 우리나라는 현재 이들이 흘린 피를 잊지 않기 위해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정해 기리고 있다. 

한국전쟁 초반 국군이 북한군에 밀리며 한반도 전체가 빨갛게 물들 뻔했다. 하지만 합참의장을 지냈던 백선엽 장군과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맥아더 장군, 그리고 이름도 빛도 없는 수많은 전쟁 영웅 덕분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덜 알려진 한국전쟁 영웅은 임부택(1919~2001) 육군 소장이 대표적이다. 국군경비대 창설 멤버로서 중사 계급으로 교관을 맡아 사병(병사와 부사관) 군번 ‘1번’(110001)을 받았다. 이후 국방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1기로 소위 임관을 한 그는 1950년 1월 6사단 7연대장으로 부임해 북한군의 남침 징후를 포착하고 강원 춘천 소양강변 인근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6월 25일 개전 당일, 그의 예측이 적중해 열세의 화력으로도 춘천으로 향하는 북한군을 3일간 막아냈다. 이는 개전 초기 큰 혼란에 빠졌던 국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한강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국가보훈처는 기록하고 있다.

임 소장은 같은 해 7월 충북 음성 ‘동락리 전투’에서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기습공격으로 섬멸해 6·25 전쟁 첫 승리를 기록했다. 당시 공로로 7연대 부대원 전원이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고 한다. 1951년 4월 6사단 부사단장으로 있던 시기에는 경기 양평 용문산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고도 반격해 2만명을 사살하고 3500명을 포로로 잡아 전쟁 최대의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김신 공군 중장
김신 공군 중장

김신(1922~2016) 공군 중장이 걸어온 길은 우리나라 공군의 역사이기도 하다. 백범 김구 선생의 차남으로, 대를 이어 나라에 헌신했다. 전쟁이 일어난 다음날인 6월 26일 이근석 대령 등 10명의 공군 장교와 함께 미군으로부터 ‘F-51 머스탱’ 전투기를 인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미국은 F-51 전투기 인수 조건으로 ‘훈련 없이도 전투기를 탈 수 있는 조종사’를 원했다. 중령이었던 김 중장은 10명 중 유일하게 미 공군에서 F-51로 훈련받은 경험이 있어 ‘국군 첫 전투기 인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일행과 쉬지 않고 훈련해 7월 2일 전투기를 이끌고 귀국했고, 휴식도 없이 바로 다음날인 3일부터 출격해 강원 묵호·삼척지구, 서울 영등포·노량진지구 전투 등에서 적 부대와 탄약저장소를 맹렬히 공습했다.

특히 대령으로 제10전투비행 전대장을 맡은 뒤에는 미 공군이 수차례 출격하고도 성공하지 못한 평양 근교 ‘승호리 철교’ 폭파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승호리 철교는 평양 동쪽 10㎞ 지점, 대동강 지류인 남강에 설치된 철교로 군수물자를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적 후방보급로 요충지였다.

김영옥(1919~2005) 미국 육군 대령은 재미교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이탈리아와 프랑스 전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제대했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했다. 그는 한국인 유격대를 지휘하며 정보수집 임무를 수행했고, 미 7사단 31연대 정보참모로도 활동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공세로 소양강 지역을 방어하던 31연대가 철수하자 미군과 한국군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아 적을 저지하기 위해 후퇴하는 중대급 한국군 병력을 집결시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작전을 수행했다.

같은 해 5월 중공군의 2차 공세가 이어지자 구만산·탑골 전투와 금병산 전투에서 직접 부대를 진두지휘하며 사기가 떨어진 부대원들을 독려해 승리로 이끌었고, 유엔군 부대 중 가장 빠르게 진격해 제일 먼저 캔자스선(임진강~양양을 연결한 유엔군 방어선)에 도달했다. 

이후 철의 삼각지대에서 전투를 수행하던 중 중상을 입고 일본 오사카로 후송돼 치료를 받은 후 다시 전선에 복귀해 1952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미국 정부로부터 은성무공훈장과 동성무공훈장을 받았으며 2005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죽음을 불사하고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히 산화한 영웅도 있다. 제주 출신 박평길 육군 병장은 전쟁이 일어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참전을 결심하고 부인과 자녀를 남겨두고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1950년 10월 보병 제11사단 13연대 3대대 9중대 2소대에 편성돼 전북 지역의 북한군 패잔병 주력부대를 분쇄했고, 1951년 4월에는 동부전선으로 이동해 제9중대 2소대 분대장이 됐다. 이후 1951년 6월 강원 고성군 수동면 ‘564고지전투’에서 적의 토치카(사격진지)에 의해 쓰러지는 아군 병사가 속출하자 박 병장은 적탄을 뚫고 총을 쏘며 돌격했다. 대퇴부에 총탄을 맞아 부상을 당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적의 토치카 근처까지 달려가 수류탄을 던져 적군 10여명을 폭사시키고 적군과 백병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결국 적탄에 맞아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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