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도자, 산업과 예술의 길에 서다’ 전, 왜사기에 밀려난 조선 백자를 되살린 도공 후예들
‘근대도자, 산업과 예술의 길에 서다’ 전, 왜사기에 밀려난 조선 백자를 되살린 도공 후예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0.06.19 14:29
  • 호수 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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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부터 광복 이전까지 근대 도자의 변천사 다룬 154점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재현청자 만들던 삼화고려소 그릇 등 눈길

[백세시대=배성호기자] 고려청자와 함께 우리나라 도자기의 한축을 이루는 조선백자. 백색의 바탕흙 위에 투명한 유약을 발라 구워 만든 자기로 화려한 고려청자보다 순수한 미를 갖춘데다가 잘 깨지지 않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조선의 쇠퇴와 맞물려 점차 인기가 시들해졌고 개항 이후에는 외국산 값싼 그릇이 들어오면서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된다. 한편에선 우리의 도자전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로 창작도예의 개념이 생겨났고 광복 이후 한국도예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조선 말기부터 대한제국시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변모한 근대 도자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전시가 경기도자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8월 30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근대도자, 산업과 예술의 길에 서다’ 전에서는 개항 이후부터 광복 이전까지 생산된 작품 154점을 통해 조선의 도자가 수공업에서 산업화로 이행되는 과정을 조명한다.

1부 ‘조선의 도자, 수공업에서 산업화의 길로’에서는 개항 이후 일본 자본 유입의 영향으로 전통수공업에서 산업화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 국내 도자 산업의 발전과정을 살펴본다. 이 시기 ‘왜사기(倭沙器)’라고 불리는 일본산 수입자기의 유행 속에서도 지속적인 민수용(民需用. 군수용의 반대말) 그릇의 생산·유통을 통해 국내 도자전통을 지켜온 과정을 보여준다.  

입구에 들어서면 조선의 백자문화를 이끌었던 사옹원 분원 관요의 발자취를 볼 수 있다. 조선 왕실은 궁중에서 사용하는 그릇을 사옹원(司甕院)에서 전담해 제작했다. 사옹원은 어선(御膳, 왕에게 바치는 음식)과 궁중 연회를 담당하며 이에 필요한 기명(器皿, 살림살이에 쓰는 온갖 그릇)을 번조하는 임무를 맡아 하던 기관이다. 

특히 조선은 광주 지역에 사옹원의 분원 관요(官窯)를 설치해 국가에서 직접 가마를 굽기도 했다. 찬란했던 영광은 오래가지 못한다. 1880년대 전후로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 조선이 개항을 하자 값싼 왜사기가 대거 들어오면서 분원 역시 위기를 맞았고 결국 민영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 제작된 ‘백자청화 수복문 발’ 등을 보면 명나라의 영향을 받아 장수와 복을 뜻하는 수(壽)와 복(福)자가 들어간 수복자문 그릇이 많다. 당시 복을 기원하는 풍토를 반영하면서 그림보다 문자가 제작하는 시간을 줄여주고 대량생산이 용이했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가 많았다.

또 ‘백자 수복문 대접’, ‘백자다채 수복문 대접’ 등 조선백자를 밀어낸 다양한 왜사기도 볼 수 있다. 요즘 만든 그릇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매끄러운 질감의 일본산 그릇은 저렴한 가격과 높은 품질을 앞세워 국내 도자시장을 장악했다.

이와 함께 1940년대 우리 자본으로 시작된 행남사, 밀양도자기 등 국내 도자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국내 기업들의 초기 생산품도 만나볼 수 있다.

이어지는 2부 ‘제국주의 시대, 쓰임의 도자에서 창작의 도자로’에서는 1900년대 들어서 제국주의의 풍파에 맞서 전통도자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과 의지에 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침투하면서 탄생한 재현청자가 창작도예의 탄생에 영향을 준 과정을 살펴본다. 이 시기 왕실 중심 민족 문화의 진작을 위해 탄생했지만 시대적 한계를 이겨내지 못하고 일본자본에 의해 운영되는 비운을 맞은 이왕직미술품제작소, 대표적 재현청자 요장인 삼화고려소, 한양고려소 제작품들을 통해 한국도예의 여명기를 되돌아본다.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1908년에 서울 광화문 근처에 설립된 왕실기물 제작소이다. 전통수공업체제의 붕괴와 기계제 생산으로 인한 공예품의 질이 떨어지자 조선의 전통적 공예미술을 되살리고자 설립됐다. 설립 당시에는 명칭이 한성미술품제작소였으나 1910년 12월 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 변경됐다. 이도 잠시 1922년 일본인에 의해 민간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로 전환되면서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 1936년 7월에 폐쇄됐다.

한성미술품제작소 시기에는 왕실공예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했지만 일본인의 손에 넘어간 후로는 일본의 전통문양인 오동잎 문양이 나타나기도 했으며, 기념품, 트로피 등 상품제작에 주력했다. 탄생 의도와 달리 일본인의 이국취향에 맞추면서 공예 발달을 왜곡하는 데 일조했다. 전시에서는 ‘청자 비원소 명 향로’, ‘분청사기 연화문 발’ 등을 통해 당신 흔적을 쫓는다.

구한말 일본의 고려자기 애호 취향이 확산되면서 근대기에 이르면 고려청자를 재현, 상품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 경성미술구락부(京城美術俱樂部)라는 미술품 경매회사가 설립되면서 청자는 중요한 거래의 품목이 됐다. 청자에 대한 관심은 청자를 재현하고 기념품으로 출시하기에 이른다. 이때 삼화고려소, 한양고려소 등 만들어져 재현품 고려자기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판매했고 여기서 활동했던 해강 유근형(1894 ~1993) 등 명장들에 의해 한국 도예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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