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의 멸치 선물
[백세시대 / 세상읽기]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의 멸치 선물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0.06.26 13:58
  • 호수 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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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때 정치인들이 기자들에게 ‘떡값’(촌지)을 주거나 선물 등을 주는 관행이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1927~2015)은 기자들에게 멸치를 곧잘 선물했다. 그의 부친이 거제에서 멸치잡이어업을 했기 때문이다. 정치부 기자치고 김 대통령으로부터 멸치상자를 받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다. 아마도 대통령에 오른 배경(?) 중 하나가 ‘멸치’일지도 모른다. 

6선 의원을 지낸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도 기자들에게 선물을 했다. 그가 신한민주당 대변인을 그만둔 직후 인터뷰를 하고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기자의 집에 멸치상자가 배달됐다. 이후로도 오래 기간 명절마다 말린 고추, 멸치, 커피세트 같은 선물을 보내곤 했다.

홍사덕 전 의원은 경상도 악센트가 실린 저음에 쌍꺼풀 진 커다란 눈동자로 DJ(김대중), YS(김영삼) 진영을 넘나들며 파란만장한 족적을 남겼다. 정치 인생 말년에는 박근혜 경선 캠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며 ‘친박 좌장’이란 말을 듣기도 했다. 경북 영주 출신으로 영주중, 서울대 사범대 부속고,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왔다. 1981년 11대 총선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고향인 영주에서 당선됐다. 이후 12·14·15·16·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홍 전 의원에게서 성장기에 대해 잠깐 들은 게 있다. 그는 나이 들어서도 촌놈 기질을 못 버렸지만 학교 다닐 때는 어지간히 촌놈이었다고 했다. 고등학교부터 서울서 다니게 된 그는 지각을 많이 했다. 호기심이 많아 학교 가는 길에 간판을 보고 그 가게에 불쑥 들어가 수다를 떨다가 늦었다는 것이다.

“진명여고 앞에 ‘허영숙 산부인과’라는 간판을 보고 춘원 이광수 부인이 하는줄 알고 들어가 얘기를 나누느라 늦었다. 또 한 번은 시인 이상이 단골로 가던 다방이 눈에 띄어 그곳에 들어가 ‘레지’에게 이런저런 걸 묻다가 늦기도 했다.”

홍 전 의원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60년 지기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사대부고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홍 의원은 당시 유도를 했고 이 회장은 레슬링을 했다. 한때 이건희 회장의 귀는 운동을 많이 해 찌그러져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건희 회장의 장충동 집 2층의 넓은 다다미방에서 서로 힘자랑을 하며 겨루곤 했다. 그래서 이 회장 모친은 홍 전 의원이 집에 와 공부는 안하고 놀기만 한다고 눈총을 주기도 했다. 

홍 전 의원은 대학 졸업 후 삼성물산에 지원했다. 당시 월급이 가장 높은 업체가 삼성물산과 한국은행이었는데 한국은행은 이미 입사시험이 끝난 뒤였다. 홍 전 의원의 답안지를 본 이병철 회장의 장남 이맹희 당시 삼성그룹 부회장(1931~2015)은 성적이 뛰어난 홍 전 의원을 자기 방에 두려고 했다. 그런데 집에 다녀가곤 했던 홍 전 의원의 얼굴을 알아본 이병철 회장이 “건희 친구니까 네가 데리고 있는 것보다 건희와 함께 있도록 하는 게 낫겠다”고 말해 중앙일보로 발령이 났다.

1967년, 한 사람은 중앙일보 기자로, 한 사람은 이사로 중앙일보 사옥 1층과 3층에서 근무했다. 주변에선 ‘친구 사이여서 오히려 불편하지 않았나’ 하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과 같이 일했던 류근일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홍사덕 의원이 그런 배경 덕을 볼 필요는 없었다. 워낙 홍 의원이 일을 잘 하고 똑똑해 받을 만한 대우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후로 두 사람은 각자의 일이 바빠 자주 만나지 못했다. 홍 전 의원은 “한 번은 고속도로에서 건희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비서로부터 연락이 와 가봤더니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고 기억했다.

홍 전 의원이 6월 18일, 폐렴으로 77세에 별세했다. 서울대학병원 영안실에 차려진 빈소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보내온 조화가 나란히 놓여 있다. 그의 영정사진을 보는 순간 생전의 다정스런 음성과 선한 눈빛이 가슴에 따듯하게 전해왔다. 그가 “세탁소집 아들로 태어나 지금도 다림이질 하나는 자신 있다”며 웃었던 모습도, 그가 선물한 국거리용 멸치로 국물을 우려냈던 일도 새삼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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