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씨앗이 멀리 가려는 까닭은 / 오경아
[백세시대 / 금요칼럼] 씨앗이 멀리 가려는 까닭은 / 오경아
  • 오경아 작가, 가든디자이너
  • 승인 2020.06.26 14:07
  • 호수 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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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아 작가, 가든디자이너

영국 학자의 실험에 의하면

멀리 날아가 떨어진 씨앗은

가까운 곳에 떨어진 씨앗보다 

발아율 더 높고 생존력 강해

인간의 세계도 그렇지 않을까

여름 정원이 점점 뜨거워진다. 6월 21일로 하지 정점을 찍어 낮의 길이는 점점 짧아지겠지만, 뜨거움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여름 정원에서 제일 많이 하게 되는 일은 진 꽃을 따주는 일이다. 씨앗을 맺느라 영양분을 소비하지 않도록 진 꽃을 열심히 잘라주어 그 밑에서 올라오는 다음 꽃을 기대한다. 사실 정확하게 속을 더 드러내면 씨를 맺지 말고 꽃을 좀 더 피워달라는 이기적인 마음이다.

사실 식물의 탄생은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잎과 꽃을 피우는 이유 역시도 이 하나의 목표, 바로 씨앗을 맺기 위해서다. 그러니 이 씨를 만드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씨를 맺는 일로 식물의 할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최후의 마지막 관문인 씨를 어떻게 퍼트릴 것인가, 여기에 식물의 다음 세대 생존의 운명이 달렸기에 식물들은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씨앗을 퍼트리는 데 집중한다. 식물의 피우는 꽃이 각양각색 현란한 이유도 이 씨를 어떻게 퍼트릴 것인가를 고려한 디자인이라고 봐야 한다. 

연꽃의 씨는 물속에 떨어져도 수 백 년을 견딜 정도로 방수가 완벽하다. 물에 떠다니다 적당한 곳에서 적당한 날에 싹을 틔워야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제비꽃의 씨는 다 여물면 꼬투리가 바짝 마르면서 한껏 오므라든다. 그러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적당한 날에 꼬투리를 확 펼쳐 씨를 튕겨낸다. 그 퍼지는 반경이 수십 미터에 이르기도 한다. 씨 중에는 아예 날개를 단 것도 있다. 하늘을 나는 꿈을 꿨던 라이트 형제가 영감을 받은 대상은 날개를 펄럭이며 그 원동력으로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니었다. 날개로 바람의 힘을 이용해 날아가는 바로 씨앗의 특별한 비행에서 따온 것이었다. 라이트 형제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훗날 우리가 탈 수 있게 된 비행기의 전신을 만들어낸 오스트리아의 항공 기술자 ‘이고 에트리히’ 역시도 열대우림에 사는 식물인 알소미트라 마크로카르파라는 식물의 날개 달린 씨를 베껴 비행기를 만들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식물들은 자손인 씨앗을 이렇게 멀리 보내려고 이토록 많은 노력을 하는 걸까?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인 윌리엄 해밀턴과 밥 메이는 왜 식물이 씨앗을 멀리 퍼트리려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실험을 한다. 같은 씨앗을 한 구역에서는 멀리 날아가지 않고 부모 그늘에서 안전하게 자랄 수 있도록 했고, 나머지는 원래대로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한 뒤 생존율을 관찰했다. 결과는 부모 인근의 씨앗들은 발아율도 떨어지고 발아가 되어도 생존율이 낮았다. 대신 멀리 날아간 씨앗들이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며 잘 살아갔다. 이런 현상에 대해 두 박사가 내린 결론은 부모 식물의 영역 주변에는 이미 수십 년 동안, 이 식물에 찾아오거나 함께 살아가는 벌레, 곤충, 바이러스 등이 있는데 이것들이 이제 막 싹을 틔운 씨앗에게 더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고 봤다. 더불어 멀리 날아간 씨앗들은 안락한 부모의 터전에서보다 더 큰 고초를 겪지만 스스로 자라며 더 강한 생존력을 보인다고 밝혔다. 

그리 놀랍지 않은 연구 결과인데 다시 생각하면 과연 ‘우리는’ 이라는 물음표가 생기기도 한다. 전원생활이 깊어갈수록 정원 속에 사는 식물, 곤충, 동물, 그리고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내 삶의 모습이 비치곤 한다. 내 삶의 목표가 식물과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태어난 이상 어쨌든 우리는 건강하게 잘 살아야 하고, 어쨌든 우리의 자손이 이 지구에서 오랫동안 잘 살아가주기를 바라지 않나! 그래서 가끔 물어야 할 듯하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자손이 잘되도록 애쓰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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