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신민요 ‘노들강변’ 이야기 / 이동순
[백세시대 / 금요칼럼] 신민요 ‘노들강변’ 이야기 / 이동순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20.07.17 13:55
  • 호수 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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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들어도 흥이 나는 ‘노들강변’

기생 박부용은 이 노래로

만인의 연인으로 떠올라

구성진 뱃사공 노랫소리에 착상

창작 신민요의 으뜸으로 불려

언제 어디서 들어도 저절로 흥이 솟구치고 어깨춤 들썩이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들강변'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그냥 듣고 부르는 노래로도 무방하지만 만약 장고 반주가 곁들여진다면 이게 바로 금상첨화가 아닐까 합니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매어나 볼가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노들강변’1절

이제는 경기민요의 대표곡이 된 신민요 '노들강변'의 가사 전문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른 가수를 환히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부용(朴芙蓉: 1901∼?)이란 이름의 기생 출신 가수가 불렀는데, 봄날 오후의 나른한 시간에 라디오 전파를 타고 들려오던 '노들강변'의 애잔한 여운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아련한 슬픔을 머금은 듯 약간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가락으로 가수가 구성지게 엮어가던 이 노래에는 고단하고 힘겹게 살아온 우리 겨레의 강물과도 같은 역사의 내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곡조를 흥얼거리다 보면 인생이 얼마나 덧없고 무상한지 은연중에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고단한 역사 속에서도 자기 앞에 휘몰아쳐 온 아슬아슬한 풍파를 모두 이겨내고, 마침내 환한 얼굴로 강바람 맞으며 우뚝 서 있는 강가의 아름드리 버드나무 같은 우리 민족의 듬직한 표상을 느끼게 합니다.

‘노들강변’을 불러서 만인의 연인이 되었던 가수 박부용! 

그녀의 이력에 대해서도 그동안 뚜렷하게 밝혀진 자료가 없었습니다. 이 박부용의 흔적을 찾기 위해 저는 여러 곳을 더듬고 다녔는데, 마침 어느 일본인이 20세기 초반에 펴낸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1918)이란 책에서 한복을 단정히 입고 머리를 쪽진 박부용의 사진과 약력을 발견하고는 너무나 감격에 찬 나머지 혼자서 커다란 비명을 지른 적이 있습니다. 17세 때 찍은 얼굴 사진과 소개 글이 해당 책에 실려 있었습니다. 기생 박부용은 1901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습니다. 1913년, 불과 12세의 나이로 서울 광교조합(廣橋組合)에 기생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조선미인보감’ 박부용 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단정한 용모에 성품은 온유하다. 어여쁜 귀밑머리는 한 덩이 새털구름이 봄 산을 휘돌아 감도는 듯한데, 발그레한 두 볼은 방금 물 위에 피어난 한 송이 부용화를 떠올리게 하는구나.’

한창 레코드 보급에 대한 열망으로 부풀어 오르던 1933년, 박부용은 오케레코드사로 발탁이 됩니다. 박부용이 오케레코드사를 대표하는 신민요 가수로 활동했던 시기는 1933부터 1935까지 약 3년 동안입니다. 이 시기 모든 신민요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노들강변’은 1934년 1월에 신불출 작사, 문호월 작곡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 음반은 오케레코드 창립 1주년 기념 특별호로 발매되었습니다. 

노들은 ‘노돌(老乭)’에서 변화된 말로 서울의 노량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노량진은 ‘백로(鷺)가 노닐던 징검돌(梁)’이란 뜻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하네요. 노들강변은 노량진 일대의 한강 지류 강변으로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한가로운 뱃놀이가 번창했었지요. 당시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은 문예부장 김능인, 전속작곡가 문호월 등에게 전국의 민요를 발굴 수집하도록 했습니다. 문호월(文湖月, 1908∼1953)은 어느 날 만담가 신불출(申不出, 1907∼1969)과 함께 친구의 병문안을 다녀오던 길에 노량진 나루터에서 뱃사공의 구성진 노랫소리와 한강의 푸른 물결 위로 드리워진 봄버들을 바라보며 작곡의 착상을 얻었다고 합니다. 흥을 이기지 못하고 곧장 강가의 선술집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언가를 종이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문호월이 흥에 겨워 세마치장단으로 때로는 어깨춤을 추며, 또 때로는 주막집 탁자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악보를 엮어가노라면,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신불출이 즉시 노랫말로 다듬었다고 합니다. 나루터 주막집에서 만들어진 '노들강변'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삽시에 퍼져나갔습니다. 당시 식민지 백성들은 나라 잃은 서러움과 제국주의 통치로 말미암은 가슴 속 울분을 이 노래로 달랬습니다. 

193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의 두 천재적 청년 문호월의 작곡에다 신불출의 기막힌 작사까지 얹으니 이로써 전설적 창작 신민요 ‘노들강변’이란 작품을 민족문화사의 제단에 헌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두 위인은 가시고 우리 곁에 없지만 빛나는 노래는 남아서 영원히 우리의 허전한 마음을 쓰다듬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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