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31] 나 같은 사람도 괜찮겠지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31] 나 같은 사람도 괜찮겠지
  • 장유승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 승인 2020.07.31 13:50
  • 호수 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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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사람도 괜찮겠지

땅은 곤륜산에서 형세가 일어났고

물은 성수해에서 신령하게 통했으리

누가 천만 리 황무지를 개척하여

세상에 나 같은 일개 서생을 용납했나

地自崑崙山起勢 (지자곤륜산기세)

水應星宿海通靈 (수응성수해통령)

誰拓幽荒千萬里 (수척유황천만리)

世間容我一書生 (세간용아일서생)

- 정란 (鄭瀾, 1725~1791),『창해시안(滄海詩眼)』 중에서


정란은 산에 미친 사람이었다.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덕유산, 속리산, 태백산, 소백산, 이밖에 전국의 명산을 두루 등반했다. 백두산은 정상까지 올랐고, 금강산은 네 차례나 올랐다. 정란의 생애는 안대회 교수의 『벽광나치오』(휴머니스트, 2011)에 자세하다.

정란은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여행을 자랑하며 글과 그림을 받았다. 채제공(蔡濟恭), 이용휴(李用休), 강세황(姜世晃), 최북(崔北), 김홍도(金弘道), 이들의 글과 그림 덕택에 정란의 존재는 잊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정란의 글은 전하는 것이 별로 없다. 『유산기(遊山記)』라는 여행기를 남겼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김홍도의 자택을 그린 <단원도(檀園圖)>에 적어 넣은 짧은 시 2편이 남아 있지만, 여행과는 관련이 없다. 그가 백두산에 올라 지었다는 시의 일부가 이경유(李敬儒, 1750~1821)의 『창해시안』에 실려 전할 뿐이다.

정란은 1785년 한라산 등반을 위해 제주로 향했다. 명산 유람의 대미를 장식하는 여행이었다. 당시 제주는 관원이나 유배객이 아니면 갈 일이 없는 오지였다. 바다를 건너는 것부터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게다가 정란의 나이는 이미 환갑을 넘겼다. 이경유와 그의 부친 이승연(李乘延)은 모두 글을 써 주며 정란을 격려했다. 이경유는 『창해시안』에 이렇게 기록했다.

“창해일사 정란은 사람됨이 기이하고 예스럽다. 노새 한 마리를 사서 이름난 산천을 유람하니 사람들이 모두 미친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만은 기이한 선비로 인정했다.”

지금도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 조선시대는 오죽했겠는가. “사람들이 그대가 하는 짓 들으면 도리어 남들과 다르다고 비난하겠지.[乃聞君所爲, 反譏異於衆]”라는 이용휴의 우려는 정확했다. 사람들은 선비의 본업과 가족의 생계를 팽개치고 산을 쏘다니는 정란을 ‘미친 선비[狂士]’라고 불렀다. 부지런히 공부해서 하루빨리 관직에 오르는 것이 유일한 인생의 목표였던 그들의 눈에 다른 삶을 추구하는 정란이 곱게 보일 리 없다. 위의 시는 사람들의 비난에 대한 정란의 답변이다(중략).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장유승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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