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시대를 초월한 ‘시무 7조’
[백세시대 / 세상읽기] 시대를 초월한 ‘시무 7조’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0.09.04 14:17
  • 호수 7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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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에 뼛속까지 저항했던 지식인 김지하(79·본명 김영일)는 1970년 5월, 잡지 ‘사상계’에 ‘五賊(오적)’이란 시를 발표했다. 그 뒤 그의 삶은 필명 그대로 ‘지하’(감옥)에서 수년을 보내야 하는 등 파란만장했다.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을 말한다. 1970년대 개발독재 과정에서 부정부패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대표적 인물형을 을사오적에 빗대어 풍자·비판했던 것이다.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에 ‘진인(塵人) 조은산’이라는, 인천에 거주하는 30대 평범한 가장이 ‘시무 7조’를 올려 화제가 되고 있다. 시무(時務)는 당세에 시급한 일이란 의미로 최치원의 증손 최승로가 고려 6대 임금 성종 때 올린 ‘시무 28조’에서 제목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서기 981년에 올린 시무 28조를 들여다보면 그 시대나 지금이나 나라의 고질적인 병폐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1조)불교 행사로 백성의 고혈을 짜내지 말 것 (3조)궁궐 경호원 숫자를 줄일 것 (8조)승려가 마음대로 궁궐을 출입하지 못하게 할 것 (10조)승려가 객관에 묵으면 행패 부리지 못하게 할 것 (14조)임금은 교만하지 말고 아랫사람을 공손하게 대하며 죄지은 자는 법에 따라 처벌할 것 (17조)부자들의 큰집은 제도에 맞지 않으면 헐어버릴 것 (21조)산천에 지내는 제사 비용이 백성에게서 나오니 금할 것 등이다. 

불교를 국교로 숭상했던 당시 승려들의 안하무인격인 처신이 심각한 사회 문제였던 듯 그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내용이 많다. 시무 7조의 내용도 그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조, 세금을 감하시옵소서  

부유한 것은 죄가 아니거늘 소득의 절반을 빼앗고 부자의 자식이 부자가 되면 안되니 다시 빼앗고 기업을 운영하니 재벌이라 가두어 빼앗고(이하 생략).

2조, 감성보다 이성을 중히 여기시어 정책을 펼치소서

비정규직 철폐니 경제민주화니 소득주도성장이니 최저임금인상이니 세상물정 모르는 것들의 뜬구름 잡는 소리로 기업의 손과 발을 묶어 결국 54조의 혈세를 쏟아 붓는 것은 감성에 불과하니(생략).

3조, 명분보다 실리를 중히 여기시어 외교에 임하시옵소서

평화와 화해 따위의 허황된 말로 감성에 목마른 백성들을 현혹시켜 실질적인 핵폐기는 안중에도 없는 북국의 돈왕과 더불어 성대한 냉면잔치를 열고(생략).

4조, 인간의 욕구를 인정하시옵소서

비서실돼지는 제 목소리가 제일 큰 줄도 모르고 도리어 수석돼지들에게 꿀꿀거리지 말 것을 종용했으나 이내 제몫의 구유통이 청주와 반포에 걸쳐 두 개인 것이 발각되었고(생략).

5조 신하를 가려 쓰시옵소서

臣(신)김0겸과 노0민은 죄가 없사옵니다. 이는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적이고(중략)이 불쌍한 자들의 죄는 그저 폐하의 엄포와 성화에 못이겨 머리와 손과 입이 각기 따로 놀아나 백성들을 농락한 죄밖에 없사옵니다(생략). 

6조, 헌법의 가치를 지키시옵소서

헌법에 의거해 그 자리에 오르신 폐하 스스로 헌법의 가치를 훼손하고 적시된 조항을 무시하며 헌법에 내재한 백성의 가치를 짓밟고 헌법이 보장한 인간의 권리에 침을 뱉으사 헌법이 경계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무아지경으로 휘두르니(생략).

7조, 스스로 먼저 일신하시옵소서

이 나라는 폐하와 더불어 백성들이 합쳐 망친 나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옵니다(생략).


9월 3일 현재 시무 7조에 대한 국민의 청원동의는 42만여명에 달했다. 서기 981년의 시무 28조나 1970년의 오적이나 2020년의 시무 7조나 도진개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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