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산책] 한 톨의 쌀
[디카시 산책] 한 톨의 쌀
  • 글=이기영 시인
  • 승인 2020.09.25 14:12
  • 호수 7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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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톨의 쌀

황금 갑옷을 입고 온 한 톨의 쌀이

어떻게 나를 뜨겁게 데우는지 몰랐네

여든 여덟 번 담금질한 저 불덩이가

한 그릇 밥으로 내게 오기까지는


불덩이 하나가 무논에 떨어져 어린 벼들의 겨드랑이 사이로 번진다. 눈이 부셔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던 태양이 아니던가. 저무는 하루가 마지막 혼신의 힘으로 어린 벼의 심장이 되고 어린 벼는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우리에게 온다. 

한 낮의 태양은 눈부신 순백색, 한 톨의 쌀에게 순백색 태양의 속살이 스며들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불타는 태양이 황금 갑옷을 입고 온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눈부신 흰 쌀밥이 저렇게 뜨겁게 다시 피어올라 내 피를 붉게 만들고 뜨겁게 나를 데운다는 걸 한 그릇 밥으로 오기까지는 몰랐다. 봄부터 가을까지 저 뜨겁고 붉고 찬란한 태양의 담금질이 있어 한 톨의 밥이 나를 더 찬란하게 빛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밥심이라는 말은 밥의 힘이라는 말이고, 밥의 힘은 태양이 우리에게 준 힘의 원천이다. 장엄한 하루가, 찬란한 일생이, 영원한 생명의 원천인 한 톨의 쌀이 나를 뜨겁게 살아있게 한다.

가을이다. 황금의 들녘이 저 불덩이에서 왔다는 걸 다시 일깨운다.

디카시‧글 : 이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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