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에 나오지 않는 조성왕조이야기 6‧끝] 순조부터 순종까지…외척과 일본에 시달리다 빛 못 본 조선말 다섯 왕
[사극에 나오지 않는 조성왕조이야기 6‧끝] 순조부터 순종까지…외척과 일본에 시달리다 빛 못 본 조선말 다섯 왕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0.09.25 14:50
  • 호수 7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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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이용해 고종을 암살하려 했던 사건을 다룬 영화 ‘가비’ 속 고종을 연기한 박휘순.
커피를 이용해 고종을 암살하려 했던 사건을 다룬 영화 ‘가비’ 속 고종을 연기한 박휘순.

순조‧헌종‧철종 60년 간 세도정치로 삼정문란 등 민생 경제 파탄 

고종은 외세 등에 내정간섭… 순종은 독차 사건으로 치아 다 빠져

[백세시대=배성호기자] 조선 23대 임금인 순조는 11세가 되던 1800년 정월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1년도 되지 않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면서 왕위에 오른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호적상 증조할머니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데 이는 조선왕조 500년을 망조로 몰고 가는 세도정치의 시대를 열게 한다.

순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3명의 임금을 거치면서 약 60년간 세도정치가 전개되는데 이 때문에 왕권은 약화되고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같은 가문들이 권력을 독점한다. 세도정치의 본래의 뜻은 ‘정치의 도리는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것’이라는 긍정적인 뜻이지만 조선 말기의 부정적인 외척 정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 

정순왕후는 3년간 수렴청정을 하면서 규장각의 권한을 축소하고 사도세자의 신원 회복도 없던 일로 하는 등 정조가 24년간 이루어 온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특히 정치적 목적으로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도한다. 1801년에 최초의 대규모 박해인 신유박해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정조 시절 성장했던 남인 세력은 몰락한다. 이 중에는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도 포함되어 있으며 신유박해 이후 정약용은 18년이나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순조에게는 맏아들 효명세자가 있었는데 숙종 이후 오랜만에 나타난 정식 왕비 소생이었다. 효명세자는 능력이 뛰어났고 순조는 세도정치를 막기 위해 그를 내세워 대리청정을 시작한다. 효명세자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박규수를 등용하며 무너져가는 조선을 다시 한번 일으키고자 하지만 갑자기 병에 걸려 22세 나이에 요절한다. 

순조마저 갑자기 사망하자 8세의 나이로 헌종이 2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재위기간은 15년으로 짧지 않지만 승하한 나이는 23세에 불과했다. 헌종의 어머니는 조대비로 유명한 신정왕후로, 풍양 조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순조 때 처가였던 안동 김씨의 세력이 강했다면, 헌종 때는 외척이던 풍양 조씨 가문의 권세가 높았고 세도정치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진다.

농사 짓다가 갑자기 왕이 된 철종

세도정치에 시달리다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못한 헌종을 이은 건 강화도령이라 불리던 이원범(철종)이었다.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손자로 계보로 따지면 헌종의 삼촌뻘이었고, 촌수로는 7촌 사이였다. 방계 출신인 이원범이 왕위에 오를 수 있던 건 순원왕후가 법적으로 철종을 헌종의 작은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원범은 첫째 형 이명이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돼 함께 강화로 유배를 갔다. 왕이 되던 19세까지 강화도에서 나무를 베면서 살았다. 자신을 왕으로 세우기 위한 행렬이 왔을 때도 잡으러 온 줄 알고 산속으로 도망치다가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왕으로 즉위한 철종은 새로운 왕비를 맞이해야 했고 헌종과 같이 안동 김씨 가문의 김문근 딸을 왕비로 삼아 외척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더군다나 왕이 되는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니 정치에 대한 안목이 부족했고 여기에 안동 김씨 세력의 매관매직과 전횡이 심각해지는 등 삼정문란(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 군정, 환곡의 부패와 타락을 의미)에 시달리게 된다.

세도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왕위에 오른 고종의 나이는 12세에 불과했다. 직접 정치를 하기에 너무 어렸고 왕위 계승자 수업을 받지 못해 수렴청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의 양어머니인 신정왕후가 잠시 수렴청정을 했지만 고종의 친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이를 넘겨준다.

섭정을 하게 된 흥선대원군은 사저이자 고종이 태어난 운현궁에서 주요 업무를 다루는데 안으로는 왕권강화를 꾀하고 밖으로는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단행했다. 세도정치의 폐단을 없애고 왕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또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양반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고 붕당 대립의 근거지이며 운영에 경비가 많이 들던 전국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혁파한다.

1873년부터 직접 정사를 돌보기 시작한 고종은 1880년대부터 군국기밀과 정치를 총괄하던 관청인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만들어 청과 일본에 영선사와 수신사를 각각 파견, 근대 문물을 익히도록 한다. 하지만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참지 못한 군인들의 반란인 1882년 임오군란과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외세에 간섭을 받다가 강제 퇴위당한다. 

독 탄 커피 바로 뱉어 목숨 건진 고종 

한편 1898년에 러시아 역관으로 일하다 유배된 김홍륙이 고종을 시해할 목적으로 고종과 태자가 마시는 커피에 독약을 투입한 사건이 발생한다. 커피 애호가였던 고종은 커피맛의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뱉어냈지만 태자인 순종은 그대로 다 마셨고, 후유증으로 인해 이가 다 빠져 틀니를 끼고 혈변을 자주 누는 등 몸이 극도로 안 좋아졌다고 한다. 

아픈 몸을 이끌고 강제로 왕위에 오른 순종은 이에 대한 반발로 양위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본은 더욱 노골적으로 침략을 단행해입법권, 관리 임명권, 경찰권, 사법권 등을 야금야금 일본의 것으로 바꿨고 결국 1910년 8월 29일에는 조선의 주권을 차지하는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했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왕조는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내용을 마지막으로 조선왕조실록(순조실록) 역시 마무리 된다.    

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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