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선생님, 감사합니다 / 신은경
[백세시대 / 금요칼럼] 선생님, 감사합니다 / 신은경
  • 신은경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 승인 2020.10.08 18:49
  • 호수 7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3시절 빛바랜 일기장엔

아버지 잃은 감정 고스란히 담겨

숨기고 싶었던 일기장 본 선생님

격려 메시지로 내게 큰 힘이 돼

지금에 와서야 감사 인사 드려

나이가 들어가며 하면 좋은 일 중 하나, 바로 지나간 일기나 메모를 정리하며 나의 모습을 찬찬히 관찰해 보는 것이다. 빛바랜 일기장 속에서 중학교 2학년 어린 여학생을 만났다.

어느 겨울날 아침, 어디서 전화 한 통을 받은 엄마는 새하얘진 얼굴로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나가셨다. 무슨 영문인지 소식은 없는데, 그 사이 친척들이 집으로 찾아오며 문간부터 통곡하며 들어왔다. ‘어쩌면 좋으냐, 이제.’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무슨 큰 일이 일어난 걸 알 것 같았다. 눈물은 나는데 그건 슬픔이 아니라 분노였다. 

‘죽은 사람이 뭐가 불쌍해. 살아있는 우리가 더 불쌍하지. 이제 우린 어떡해. 아버지 없는 애들이 되었잖아.’ 

잿빛 하늘을 쳐다보며 이게 모두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기적적으로 아빠가 살아 돌아오시기만을 기도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마에게도 우리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으셨다. 출근하시던 중에 심근경색을 일으켰고, 회사에 도착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나의 유일한 감정 출구는 일기장이었다. 아버지를 잃고, 달라진 환경을 바라보아야 하는 예민한 중2의 감정을 모두 기록했다. 졸지에 4남매를 키우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엄마의 모습이 거기 다 있었다. 맏딸인 내가 엄마를 이해하고 큰 힘이 되어 드려야 하는데, 소심하고 예민한 사춘기인 나는 엄마에게 푸근한 말은커녕, 마음에 상처만 되는 소리만 하는, 엄마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딸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갈등과 슬픈 감정들이 일기장에 다 들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상담 겸 사회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일기장 제출을 하라고 하셨다. ‘일기를 내라고? 일기란 모름지기 나의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날 것’인데, 그걸 선생님께 제출하라고? 어떻게 자신의 모든 감정을 써놓은 일기장을 선생님께 제출하라는 무지막지한 요구를 하실 수 있어?‘

나는 일기를 제출하지 않는 것으로 반항했다. 그런데 며칠 후 선생님은 나를 살살 꼬드겼다. 내용은 절대 안 읽어 볼 것이고, 그냥 일기를 쓰고 있는지만 확인한다고 약속하셨다. 그 말씀을 철석같이 믿었다. 

선생님은 명문 K대 출신의 인텔리 교사였다. 얼굴이 하얗고 키가 훤칠하게 크신 그 분은 창밖을 쳐다보며 가느다란 눈으로 연한 미소를 짓곤 했다. 오른팔이 의수여서, 아니 팔 전체를 의수를 하셔서, 칠판글씨도 왼손으로 쓰셨다. 진한 청색 옷을 자주 입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름엔 짧은 팔 옷은 입지 못하셨지만, 시스루 천으로 된 블라우스를 입기도 하셨다. 수업 중엔 간혹 왼팔로 오른팔 의수를 잡고 있기도 했고, 그 왼손으로 얌전하고 정갈하게 판서를 하셨다.

수업 중에 간혹, 공부를 지독히 열정적으로 했다던 그녀의 학창 시절 이야기도 해 주셨는데, 공부 내용보다도 그런 곁가지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도전이 되기도 했다. 다음 날, 선생님은 후루룩 일기장을 넘기며 “자 봐, 난 안 봤다. 안 봤어” 하면서 내 일기장을 돌려주셨다. 심통 난 얼굴로 일기장을 받아들었다. 선생님은 진짜 안 보셨을 거야. 진짜. 

그리고 그날 저녁 일기를 쓰려고 펼치는 순간. 나는 너무나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선생님의 메시지가 거기 쓰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정갈한 필체로.

“찬미 예수! 은경아, 조용히 읽어 보았다. 어쩜 은경인 선생님이 생각했던 만큼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까? 계속 일기책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 함께 희, 비, 애, 락 하길 부탁하겠고. 그리고 인간은 제 나름대로 열등의식과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마련이야. 매사에 긍지를 가지고 행동하고 또 조금은 여유 있는 성격의 소유자가 되어야겠지. 삶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만큼은. 아빠 생각하는 것만큼 열심히 공부하고, 엄마 생각하여라.”

세상에 이럴 수가!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엎드려 엉엉 울다가 훌쩍이며 쓰기 시작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내 맘을 전부 쏟아놓은 일기장이라, 푸념이 가득 쓰인 일기장이라,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 그래요. 아주 잘한 것 같고 선생님께 감사하기만 해요. 열등감, 자존심 이젠 다 필요 없어요. 선생님 쓰신 것 처음엔 깜짝 놀랬어요. 읽는 중 눈물이 쑥 나와 얼떨결에 앞에 놓인 화장지를 뜯어 닦아버렸죠. 저도 이제 힘내서 살겠어요. 열심히 공부하고, 엄마한테 효도하고, 마음을 넓히고. 사실, 전 전체 석차를 쓴 종이를 책꽂이 앞에 끼워놓을 정도로 속 좁은 사람이었어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나가겠어요. 그런대로 행복해지겠지요. 동생들도 다 제 나름의 생활이 있을 텐데 다 착한 애들 될 거예요.’

선생님은 내 답장을 읽지 못하셨다. 부끄럼타는 내가 선생님의 코멘트에 대해 그 놀람과 감사를 표현한 적이 없었으니까. 이제야 이야기한다. 정난영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