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기고] 바보 꽃, 된 서리 맞다
[백세시대 / 기고] 바보 꽃, 된 서리 맞다
  • 이영숙 수필가‧시인
  • 승인 2020.10.16 14:03
  • 호수 7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영숙 수필가‧시인
이영숙 수필가‧시인

철모르고 피는 꽃을 ‘바보 꽃’이라고 한다.

우리 동네에는 장미덩굴들이 사이좋게 얼크러져 있는 장미아파트가 있다. 장미향이 퍼져 나오는 5월이면 앞을 지날 때마다 봄 기분을 치켜세워준다. 소담스러운 꽃송이들이 어찌나 실하고 정갈한지, 귀티 나는 부인네 같다. 장미꽃으로 2g의 향수를 만들려면 4000개의 꽃봉오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것도 오월의 이른 아침, 기계가 아닌 숙련된 사람의 손으로 따야 한다. 그렇게 많은 송이들이 피어서 동네를 밝게 해준다.

아파트 담장의 쇠창살 위에 기대고 있는 굵직한 덩굴들은 활처럼 휜 것과 위로만 뻗어 나가려는 어린 가지들로 복닥거린다. 장미아파트 주민뿐만 아니라 오고 가는 사람들도 덤으로 얼굴이 환해진다. 초여름까지 활화산처럼 그리도 붉던 꽃들은, 슬며시 푸른 이파리 투성이다.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 잎들마저도 모두 땅으로 흘러 내렸다. 가시들만 남아서 위상을 뽐내고 있다. 

가을이 끝도 없이 질질 끌더니만 가시박이인 줄기에 난데없이 가냘픈 빨간 장미가 꽃잎을 열었다. 부조화 속의 조화처럼 여름 같은 날씨도 아니고, 가을 날씨도 아니게 엉거주춤한 틈을 타고 이모작한 식물같이 한 번 더 얼굴을 내밀었다. 비닐하우스 안도 아닌 허허로운 바깥에서 핀 장미는 봄꽃처럼 소담하진 않아도 그런대로 꽃으로 보아줄 만하다.

철모르고 피어나 벙글거리는 장미를 보니, 눈보라치는 겨울 나뭇가지 끝에 달랑 한 닢 매달려 있는 잎사귀가 연상된다. 그 잎을 보고 어른들은 ‘덜 떨어진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사람이 얼띤 행동을 한다든지, 상황과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이를 가리켜 “에이! 덜 떨어진 놈”하고 일축해 버린다.

시장엘 나가보면 철없이 쏟아져 나오는 과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겨울에 딸기가 상자 째로 포개져 있는가 하면, 여름방학 때나 돼야 맛볼 수 있는 노란 참외가 시선을 잡는다. 특수재배의 기법은 과채류들을 철없게 만들어 놓고 있다. 

여름이 물러서기를 더디 하더니만 낭만의 가을을 잡아 삼켰다. 죽은 가을을 위해 통곡이라도 하야 할까보다. 나뭇가지가 허망한 듯 바람과 맞설 채비를 한다. 이제 몸동작이 느린 사람은 고운 단풍을 볼 수 없게 될 것 같다. 

문명의 이기 속에 지구가 신열을 한다. 종래에는 우리도 앓고 있다. 바보 같은 사람들로 인해 지구를 얼빠지게 했고, 바보 겨울을 불러들였고 바보 꽃을 피게 했다.

농익지 않은 가로수의 은행잎이 바닥에 쌓여 바람이 시키는 대로 뒹굴고 있다. 시절 모르고 피어난 어설픈 바보 꽃이 더 추워 보이는 10월의 밤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