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을이다! /오경아
[백세시대 / 금요칼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을이다! /오경아
  • 오경아 작가, 가든디자이너
  • 승인 2020.11.06 13:47
  • 호수 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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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아 작가, 가든디자이너
오경아 작가, 가든디자이너

지난 여름 지독한 장마에

차가 침수돼 폐차되고

뜻밖의 부상을 당하기도 했지만

단풍은 붉은 주단 길을 만들고

나는 봄을 위해 알뿌리를 심는다

올여름이 시작되기 전 주문했던 튤립, 크로코스, 수선화, 붓꽃의 알뿌리가 몇 달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어제 도착했다. 

농사를 짓는 일처럼 정원을 가꾸는 일도 한 해 동안의 일정이 정해져 있다. 가을이면 내년 봄에 올라올 알뿌리를 심어야 하고, 봄이 되면 여름에 피어날 식물을 심어준다. 

그리고 여름에는 여름 식물이 아니라 늦가을까지 피워줄 식물을 심는다. 앞당겨 심어주고 기다리지 않으면 정작 그때가 되었을 때 식물을 즐길 수가 없다. 

그래서 가끔 정원 일을 나는 ‘패션쇼’에 비유하는데, 봄 컬렉션 쇼에서는 가을옷을 보여주고, 가을 쇼에서는 봄의 패션을 보여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사자성어의 마지막 ‘근심 환(患)’을 ‘기쁠 환(歡)’으로 바꾼다면 이 경우 딱 맞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준비하지 않으면 기쁠 일도 없다!’ 

올 한 해 전 세계가 정말 힘겨웠던 시간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남편과 나도 여러 일을 겪었다. 길고 지루하고 막무가내였던 장마철에 뜻하지 않게 도로에 물이 차올라 차가 침수되어 사라지는 일도 있었고, 나는 발목의 인대가 끊어져 두 달 넘게 깁스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터지는 깊은 한숨과 짜증, 불안이 내 생활을 흔들었다. “올해 정말 왜 이럴까….” 딱히 어느 대상에 화를 내야하는지도 모를 개운하지 않은 꿈자리 속을 걷는 듯한 나날이기도 했다. 그러다 며칠 전, 이미 주문해두었던 알뿌리 식물이 멀리 네덜란드에서 부산항으로 막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정신이 좀 차려졌다.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을 건 심어야지!’

알뿌리를 분류하면서 이상하게 다시 가슴이 설렜다. 길고 긴 겨울 추위를 견디고 내년 봄에 꽃을 피워줄 식물들이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50일이 넘는 장마에 가장 힘들었던 건 식물들이었을 것이다. 우리야 집 안으로 들어가 피할 곳이라도 있었지만 식물들은 그 자리에서 고스란히 그 비를 다 감수했으니 말이다. 

그 빗속에서는 진정 정원의 식물이 올해 살아남아 있기나 하려나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을 우리 정원에는 식물이 여전한 걸 보니 얼마나 신기하고 고마운지. 

며칠 전 팩스를 보내기 위해 동사무소에 가는 길이었다. 그 길은 설악동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봄에는 늘어선 왕벚나무 가로수에 흰 꽃길이 만들어지는데, 이제는 단풍이 붉은 주단을 휘감은 듯했다. 언제 이렇게 됐을까, 고개를 들어 설악산을 보니, 이미 단풍이 정상에서부터 울긋불긋 설악동으로 다 내려온 걸 여태껏 몰랐던 거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가을은 와 있고, 겨울이 올 것이고, 다시 봄이 올 것이고…. 생각해보면 세상은 늘 이렇게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것은 오고, 지나갈 것은 지나간다.

침수로 차를 폐차시킨 뒤, 몇 달이 지나도록 남편은 내내 차에 미안하고,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에 대해 화를 삭이지 못하는 듯했다. 

단풍 구경을 하러 가자고 꼬셔서 ‘주전골’ 산책 길을 두 시간 남짓 걸었다. “차가 물에 잠겼어도 내가 안 다쳤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일이고, 발목을 다쳤어도 그래도 이제 다시 걸을 수 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거고….” 진짜 불행은 그럼에도 불구하지 못하고 뭔 일이 나야 하는데, 여전히 우리가 행복하니 행복한 일이 아니겠냐고. 아무리 코로나로 우리의 삶을 휘둘러도 그래도 이 가을을 볼 수 있으니, 이 지구에서 우리의 삶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니 우린 행복한 거라고 굳게 믿는다. 

다시 가을이다! 이제 내년을 위한 봄을 준비해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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