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 외교사절 맞던 정관헌, 영상 미술관으로 변신
고종이 외교사절 맞던 정관헌, 영상 미술관으로 변신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0.11.06 14:03
  • 호수 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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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아트 플랜트 아시아 2020:토끼 방향 오브젝트’
덕수궁의 전각과 행각을 미술관으로 활용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김환기, 박수근 등 내로라하는 근현대작가의 대표작들을 선보인다. 사진은 관람객들이 석어당에 설치된 이불 작가의 '키아스마'를 둘러보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덕수궁의 전각과 행각을 미술관으로 활용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김환기, 박수근 등 내로라하는 근현대작가의 대표작들을 선보인다. 사진은 관람객들이 석어당에 설치된 이불 작가의 '키아스마'를 둘러보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함녕전, 즉조당 등 주요 전‧행각에 박수근 등 근현대작가 대표작 소개

김환기 ‘나는 새 두 마리’, 박서보 ‘묘법 no 21-75’ 등 유명작품도 전시

[백세시대=배성호기자] 지난 11월 3일 서울 종로구 덕수궁 석어당. 대한제국 시기 지어진, 덕수궁 유일의 2층 목조 건물에는 뜻밖의 미술품이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높은 이불 작가의 미래 지향적인 작품 ‘사이보그 W10’과 ‘키아스마(염색체)’가 설치돼 있었던 것이다. 로봇과 유전자를 통해 인류의 갈등을 드러낸 두 작품의 흰색 몸체는 하얀 창호지, 대청마루와 천장 대들보의 고목 색깔과 오묘하게 어우러져 색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서울 정동 동아시아예술제위원회와 중구청이 주최하는 ‘아트 플랜트 아시아 2020: 토끼 방향 오브젝트’가 11월 22일까지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한국 근대사를 상징하는 정동 일대를 동아시아 문화예술 생산과 교류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취지로 마련한 첫 행사다.

전시 주제는 덕수궁이 위치한 정동(貞洞)과 발음이 같은 정동(正東) 쪽을 가리키는 옛말인 묘방(卯方·토끼 방향)에서 따왔다. 김환기, 박서보, 박수근, 김창열, 윤형근, 이우환 등 근현대 작가를 비롯해 강서경, 김희천, 양혜규, 이불 등 동시대 작가 19명의 작품이 덕수궁 내 주요 전각·행각, 연못과 마당 등에 설치됐다. 또 로이스응, 호루이안, 호추니엔 등 주목할 만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아시아 작가 3명도 참여했다.

함녕전을 둘러싼 행각(行閣)에는 근현대에 활동한 대가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푸른색으로 수평선과 달, 두 마리 새를 그린 김환기의 ‘나는 새 두 마리’(1962), 화강암 같은 재질로 집과 나무, 여인과 아이를 표현한 박수근의 ‘마을’(1964) 등 국민 화가의 그림을 볼 수 있다. 혹독한 그림 수행을 통해 명상적인 화면을 완성한 김창열 ‘물방울 no.30’과 윤형근 ‘청다색 78’,이우환 ‘선으로부터’, 박서보 ‘묘법 no 21-75’ 등 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는 작품이 모여 있다.

또한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들도 함께 내걸었다. 화문석과 나무 바퀴, 가죽으로 이뤄진 강서경의 설치 작품 ‘둥근 유랑’과 ‘좁은 초원’은 원래 함녕전 행각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공간과 호흡하고 있었다. 정희승의 장미 사진 연작도 고궁에 핀 꽃처럼 조화로웠다. 검정 놋쇠 도금 방울과 시커먼 털이 가득한 양혜규의 설치 작품 ‘소리 나는 깜깜이 털투성이 포옹’은 궁에 사는 생명체처럼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뭉게구름이 비친 강과 초록 산을 그린 이우성의 걸개 그림은 고궁에 자연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정희승 작가 ‘장미는 장미인 것이 장미’
정희승 작가 ‘장미는 장미인 것이 장미’

고종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즉조당은 15송이의 각기 다른 장미 초상이 만발해 있다. 거트루드 스타인의 싯구를 차용한 정희승 작가의 사진 작품 ‘장미는 장미인 것이 장미’(Rose is a rose is a rose)다. 양면 액자를 설치해 정면에서 볼 때는 작품 너머로 노랗고 붉게 물든 후원이 보이고 전각을 돌아 후원으로 가면 중화전이 배경이 된다. 

1900년 대한제국 시절 지어져 고종이 다과를 들거나 외교사절단을 맞았던 정관헌은 영상 작품을 상영하는 열린 극장으로 변신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에 전통 목조 건축 요소가 가미된 화려하고 이색적인 회랑 건축물에서 정은영, 김희천, 차재민 작가의 영상 작품이 상영된다. 외국 사신과 손님이 머물렀던 준명당에서는 호추니엔의 ‘노 맨 Ⅱ’가 상영되고 있다. 알고리즘으로 생성한 상상 속 형상 50여 개가 거울 위를 유령처럼 떠돈다. 

덕수궁의 건축물과 역사, 아름다운 야외공간을 활용한 구동희, 오종, 정지현, 최고은 작가 등의 작품도 주목할 만하다. ‘비상(飛翔)’이라는 키워드로 조회되는 전국 공공조형물의 이미지를 입체로 재구성해 덕수궁 연못에 띄운 구동희의 ‘비상-수평선’, 중화전 앞 해태상을 재구성한 정지현의 ‘에브리 해태’, 궁궐 내 굴뚝과 소화전의 원형을 대리석 판석재로 재가공한 최고은의 조각 ‘오페쿨러’ 등이 눈길을 끈다.

고궁이 전시 전용 공간이 아니다 보니 단점도 있다. 궁궐 건물을 활용한 전시여서 관객들은 영상 등 일부 작품을 제외하면 전각 밖에서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 자연광의 반사나 그림자가 감상에 방해되기도 하고, 대가들의 고가 작품은 작품 보호를 위해 설치한 유리벽의 반사광 때문에 제대로 보기가 어려운 점은 아쉽다. 65세 이상 어르신과 6세 이하는 무료이며 그 외는 덕수궁 입장료(1000원)만 내면 된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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