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의리파 가수 최남용의 쓸쓸했던 생애 / 이동순
[백세시대 / 금요칼럼] 의리파 가수 최남용의 쓸쓸했던 생애 / 이동순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20.11.27 13:57
  • 호수 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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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개성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이애리수 소개로 가수 데뷔

‘들꽃타령’ 등 100여곡 발표

 6·25 이후엔 영화제작에 종사

 각종 선행에도 빛 못 봐

가수 최남용은 1910년 경기도 개성에서 수완이 좋고 부유한 ‘송도거상(松島巨商)’의 아들로 출생했습니다. 성장기 때부터 내성적이고 감상적 기질이었던지라 문학, 음악 쪽으로 호감을 가졌었고, 송도고보를 다니던 중에는 달 밝은 밤에 기타와 바이올린을 들고 선죽교와 만월대로 가서 악기연주와 가창 연습에 심취했다고 하네요. 그러던 중 부친의 사업실패로 가정형편이 차츰 기울자 학업을 중단하고 쌀을 전문으로 거래하는 미곡상(米穀商)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최남용은 사업에 종사하면서도 틈틈이 악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황성옛터'의 가수 이애리수가 고향 개성을 다니러 왔다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 최남용에게 찾아와 서울로 가자고 권유했고, 이애리수는 그를 자신이 전속으로 활동하던 빅타레코드사 이기세(李基世, 1888~1945) 문예부장에게 소개했습니다. 그것이 최남용의 22세 되던 1932년 가을이었습니다. 이후 빅타사에서 '마음의 거문고' 등 30여곡을 발표했습니다. 빅타 시절에는 ‘홍작’(紅雀)이란 예명으로 일본 빅타사에서 음반을 내기도 했습니다. 당시 가수들은 한 레코드사에 전속으로 활동하면서 조만간 다른 회사로 소속을 옮길 계획이 있는 가운데서도 두 회사 이름으로 제각기 음반을 발표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최남용도 이에 해당합니다. 1935년 1월에 ‘즐거운 연가(戀歌)’와 ‘거리의 향기’ 등 두 곡이 수록된 음반을 태평레코드사에서 발표합니다. 소속사를 완전히 옮긴 다음에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노라면 바로 이 음반이 태평에서 발표했던 첫 앨범으로 기록이 됩니다. 태평레코드사에서는 ‘구룡포’(具龍布)란 예명과 최남용이란 본명을 함께 사용했습니다. 태평레코드사에서 발표한 최남용 앨범의 곡목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이 가운데서 ‘들꽃타령’이란 노래는 가사의 자연친화적인 대목이 우리의 시선을 주목하게 합니다. 가을 산야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야생초인 들국화를 작가는 ‘자연의 따님’이라 표현하고 있네요. 인간의 삶은 허물어졌어도 대자연은 여전히 청정하고 낙백한 인간에게 무한정한 위안을 보내줍니다. 


모르는 달빛 아래 이슬을 깔고/ 가만히 방글방글 웃음을 짓는/ 나는야 들국화다 아 자연의 따님// 봄철엔 수집어서 못 피었지요/ 가을이 깊어갈 제 남 몰래 피는/ 나는야 들국화다 아 자연의 따님// 누구를 뵈오려고 이 단장했나/ 초생달 아미아래 눈물 지우는/ 나는야 들국화다 아 자연의 따님

 ‘들꽃타령’ 전문


그 외에도 ‘연모(戀慕)’, ‘말 못 할 사정’ 등 80여곡이나 취입했습니다. 태평레코드사에서 발표한 마지막 곡은 1938년 6월의 ‘홍등야화(紅燈夜話)’입니다. 30여곡을 발표했던 빅타사보다 무려 여든 곡 넘게 발표했던 태평레코드사가 가수 최남용의 실질적인 터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39년에는 오케레코드사에서 ‘통사정’, ‘항구는 기분파’, ‘무정’, ‘눈 쌓인 십자로’ 등 4곡을 발표합니다. 1939년 12월에 발표한 ‘눈 쌓인 십자로’가 최남용이 가수로서 발표했던 마지막 곡입니다. 그러니까 최남용이 식민지 가요계에서 활동했던 기간은 도합 7년 남짓한 세월입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최남용은 무궁화악극단을 조직해서 공연을 다녔습니다. 말하자면 극장 쇼 무대의 프로모터로서 남다른 기질을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당시 1세대 가수 채규엽(蔡奎燁)이 자기관리에 실패해서 몹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최남용은 선배 가수를 돕는 공연을 열었는데 그 수익으로 채규엽의 삶에 새로운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1946년 7월에는 서울 동양극장에서 무궁화악극단 주최로 특별한 공연 하나가 막을 올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했던 여성가수 박향림(朴響林) 추모공연입니다. 이 공연의 전체 기획과 진행을 가수 최남용 선생이 맡았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최남용은 의리의 사나이였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최남용은 대구로 피난 내려와 당시 대구 육군본부 휼병감실(恤兵監室) 소속의 군예대(KAS) 조직사업에 앞장섰고, 정훈공작대의 기획실장으로도 일했습니다. 이후 영화제작 일을 계속하게 되었을 때 배우지망생 김경자란 소녀가 최남용의 절대적인 후원 속에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지요. 나중에 김경자가 배우로서 정식 예명을 쓰게 되었을 때 은인이었던 최남용을 아버지처럼 생각하며 그의 성씨를 따서 최지희(崔智姬)로 지었다고 합니다.

최남용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가정형편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고보 재학 중 시장에서 쌀장사를 하다가 문득 가수의 길로 접어들어 빅타, 태평 두 레코드사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다가 영화계로 활동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지만,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평소 남을 돕는 의리파로서의 명성은 높았어도 정작 자신의 삶은 늘 곤궁하고 쪼들리기만 했습니다. 1967년 최남용은 회갑도 되기 전에 뇌내출혈로 쓰러져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최남용의 병실은 쓸쓸하고 적막했습니다. 그렇게도 주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던 최남용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나 제나 세상인심이란 것은 이처럼 달면 삼키고 쓰면 곧 뱉어버리는 비속함이 그 특징이겠지요. 슬하에는 일점혈육도 없는 채로 1970년, 쓸쓸한 병상에서 회갑을 맞이한 최남용은 오직 부인 윤난성(尹蘭星) 여사 혼자서만 임종을 지키며 흐느끼는 가운데 한 많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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