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새해를 맞이하며 꾸는 꿈
[백세시대 / 세상읽기] 새해를 맞이하며 꾸는 꿈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0.12.28 10:29
  • 호수 7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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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가 금방 끝날 줄 알았다. 서너 달 후면 정상 생활이 가능할까 싶었는데 웬걸 갈수록 태산이다. 기자의 비좁은 방에 떡 허니 자리차지를 하고 있는 첼로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다. 3년 전 우연한 기회에 인근 교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첼로를 배웠다. 일 년에 두 차례씩 발표회도 하고 크리스마스 전야에는 교회 신자들과 주민 대상의 연주회도 가졌다. ‘섬 아기’ 같은 쉬운 곡에서 시작해 ‘라데츠키 행진곡’ 같은 어려운 곡(?)도 그럭저럭 소화할 정도가 될 쯤 덜컥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더 이상 주말에 모여 첼로를 배우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첼로를 가르쳐주던 젊은 여성은 졸지에 알바자리를 잃었다. 함께 첼로를 배웠던 정겨운 이들과도 소식이 끊겼다. 걔 중에는 초등생 쌍둥이 남매도 있었다.  

이제는 동네주민들을 초대해 솜씨를 자랑하던 발표회도, 따듯한 추억이 될 크리스마스 성탄 연주회도 열리지 않는다. 오다가다 보면 늘 켜있던 교회 안 불빛도 잘 안 보인다. 집에서 혼자 연습하는 시간도 적어지면서 이젠 아예 악기에 손도 대지 않고 있다. 발표회 때 받은 자그마한 기념패 서너 개와 연주 당일 찍은 사진 몇 장만이 책상 한 켠에서 먼지를 입고 있다. 

음악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심리적 안정과 위안, 육신의 평온과 평화를 가져다준다. 악기를 연주하다보면 마음이 잔잔한 수면처럼 가라앉는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이 진정되고 상대적 빈곤으로 절망하는 일 따위도 안 생긴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음악을 가까이 하기를 멈추지 않는가 보다.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수많은 명곡들 가운데 베토벤의 현악4중주 15번이 있다. 많은 음악인들이 이 곡을 연주하고 사랑하는 이유 중에 곡의 탄생 배경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베토벤은 숨지기 2년 전인 1825년, 생에 가장 힘든 시기에 이 곡을 만들었다. 

당시 베토벤은 귀도 거의 들리지 않은 상태인데다 극심한 복통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고통이 사라졌다. 신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밀려왔다. 베토벤은 그런 감정을 가지고 이 곡을 완성했고 3악장 앞에다 ‘병에서 나은 환자가 신께 드리는 감사의 노래’라고 적어놓았다. 다섯 개 악장으로 40여분 연주되는 가운데 3악장이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황무지’의 시인 T S 엘리엇은 이 곡에 대해 “엄청난 고통 이후에 찾아온 화해와 위안의 열매”라고 했다.  

노인들이 오래 동안 지속할 수 있고 성취감과 함께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일 중 음악 봉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런 이유에서 대한노인회 노인자원봉사클럽에 악기 공연단이 적잖게 있다. 색소폰·클라리넷·아코디언 연주자들로 구성된 경북 상주시지회의 고운소리봉사클럽도 그 중 하나다. 이들은 요양원과 나눔의 집, 각종 노인 행사에서 흥겨운 리듬으로 외롭고 힘겹게 지내는 노인들을 위로해주고 있다. 이 클럽의 권창희 코치는 대도시에서 교사생활을 오래하다 지방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는 경우다. 물론 처음부터 적응이 잘 된 건 아니다. 권 코치는 “한 동안은 도시생활이 생각나 힘든 시간을 보낸 적도 있다”고 했다. 그가 고비를 잘 넘긴 것은 음악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기자의 향후 노년 생활도 권 코치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대도시에서 태어난 기자는 지금껏 숨 막히는 도시생활을 해온 탓에 몸과 마음이 탈진 상태가 됐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산과 물이 있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또래의 노인들과 어울려 공연 봉사를 하고 싶은 게 꿈이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첼로를 다시 꺼내들 지 모르겠다. 시간이 많이 흘러 연주법도 잊어버렸다. 첼로라는 악기는 그 어느 악기보다 사람의 손을 많이 탄다. 단 며칠만이라도 손을 놓으면 어색하고 낯설다. 그렇지만 3년여의 짧은 시간에 오케스트라의 멋진 화음을 낼 수 있었듯이 노년의 마지막 열정을 불살라 연습에 올인 한다면 베토벤의 현악4중주를 연주하지 못하리란 법도 없지 않을까. 

코로나 바이러스도 물러가고 귀촌의 꿈도 이루는 날, 햇볕 따스한 어느 시골마을 경로당에서 신께 드리는 기도와 같은 곡을 연주하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가슴에 품고 새해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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