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를 빛낸 미술가들 1] 박수근, 한국인의 일상을 따뜻한 눈으로 그렸던 ‘국민화가’
[근현대사를 빛낸 미술가들 1] 박수근, 한국인의 일상을 따뜻한 눈으로 그렸던 ‘국민화가’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1.01.15 15:09
  • 호수 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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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은 전쟁과 가난을 딛고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하며 국민작가로 불리고 있다. 사진은 박수근 화백의 대표작인 ‘빨래터’,
박수근은 전쟁과 가난을 딛고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하며 국민작가로 불리고 있다. 사진은 박수근 화백의 대표작인 ‘빨래터’,

박완서 소설 데뷔작 ‘나목’의 모델… 전쟁‧가난 딛고 독특한 화풍 일궈

2007년 경매 최고가 기록한 ‘빨래터’, ‘할아버지와 손자’ 등 대표작 남겨

[백세시대=배성호기자] ‘국민작가’로 불리는 박완서(1931 ~2011)는 1952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의 미8군 부대 PX에 통역가로 취업한다. 여기서 그녀는 초상화를 그리던 한 가난한 화가를 만난다. 소설가를 꿈꿨던 박완서 작가는 그와 친해졌고 두 사람은 막걸리를 마시며 예술혼을 키웠다. 이후 그녀는 화가에게서 영감을 받아 ‘나목’을 써 등단했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간다. 그녀가 모델로 삼았던 가난한 초상화가도 역시 국민화가라는 애칭을 얻는다. ‘빨래터’로 유명한 박수근(1914~1965) 이야기다.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초등학교 미술시간에서부터 탁월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12살 때 프랑스의 농민 화가 밀레의 ‘만종’을 원색 도판으로 처음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던 그는 자라서 밀레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늘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가난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것. 이에 굴하지 않고 박수근은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계속해 18세 때 이른 봄의 농가를 그린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해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입선한다.

1939년에 만난 이웃 처녀 김복순을 사랑하게 된 박수근은 이듬해 강원도 금성 감리교회에서 그녀와 혼인해 새 가정을 꾸린다. 같은해 5월에 평안남도 도청 사회과의 서기로 취직해 평양으로 떠난다. 1941년부터 ‘맷돌질하는 여인’, ‘모자’(母子), ‘실을 뽑는 여인’을 잇달아 출품해 3년 연속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45년 아내를 친정에 보내고 평양에 혼자 남았던 박수근은 8·15광복을 맞았다. 11월에 도청 서기직을 그만둔 그는 강원도로 돌아와 금성중학교 미술 교사로 일했다. 38선 이북이었던 그곳에서 그는 기독교인이자 자유주의 사상을 지닌 화가로 공산 체제의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유엔군과 국군의 북진으로 자유를 얻은 그는 우여곡절 끝에 단신 월남했다. 전북 군산까지 내려간 그는 부두노동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1952년 아이들을 데리고 월남한 아내와 극적으로 상봉했지만 또다시 가난이 그를 괴롭힌다. 전쟁통 가운데 생계를 꾸리려 싼값으로라도 그림을 팔러 다녀야 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창신동에 조그마한 판잣집을 마련한 후에야 창작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던 그는 1957년 오래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대작 ‘세 여인’을 국전에 출품했으나 낙선하자 충격과 비탄에 빠졌다. 좌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음주를 시작했고 이 과음으로 건강을 잃었다. 

아픔은 오래가지 않았다. 1958년 ‘노변의 행상’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네스코 미국위원회 기획의 ‘동서미술전’에 출품된 것. 또 뉴욕의 월드하우스 화랑에서 개최된 한국현대회화전에 ‘모자’ 등의 작품을 출품하며 해외에도 이름을 알리게 됐다.

그의 예술적 위치와 평가는 날로 높아졌고, 고유의 표현 기법과 작품의 깊이도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면서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말았다.

1965년 4월 초, 간경화증과 응혈증이 악화돼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박수근은 회복이 어렵다는 진단에 따라 집으로  돌아와야 했고 이튿날 삶을 마감한다.

그의 미술세계는 사후에 더 큰 주목을 받게 된다. 박수근이 사랑받는 이유는 단연 작품성에 있다. 그의 그림에는 한국인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이 애정 어린 따뜻한 시선으로 담겨 있다. 또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박수근의 예술관과 진실한 마음이 배어있어 공감을 얻는다. 독특한 표현 방법도 사랑받는 이유다. 그는 물감을 여러 차례 발라올려 화강암 표면과 같은 우툴두툴한 재질을 만들어 낸 후 여기에 단순한 선묘로 대상의 형태를 새겨 넣어 암각화 같은 느낌을 준다. 마치 고향의 흙 같은 수수한 멋을 살려내고 있다.

‘절구질하는 여인’
‘절구질하는 여인’

또 그의 그림에는 아기 업은 엄마와 소녀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 시절에는 엄마나 누이가 아이를 업어서 키웠다. 박수근에게 아이는 생명의 귀한 존재였고 미래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기 업은 소녀’(1953)나 ‘절구질하는 여인’(1952)에서 엄마와 누이의 따스한 체온이 느껴진다.

박수근의 인물과 풍경의 구도를 분석해 보면 대체로 수직과 수평, 대각선, 좌우와 상하로 구분되는데, 전체적으로 동적이기보다 안정적 구도 쪽으로 쏠리고 있다. ‘소와 유동’(1962)은 위에 소를 배치하고 아래쪽에 네 명의 아이들이 둘러앉아 노는 모습을 담았는데,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연출의 효과를 보여준다. 

‘할아버지와 손자’(1964)는 아래쪽에 할아버지와 손자를 앉히고, 위쪽 공간에는 노상에 앉아 있는 남자들과 함지를 이고 귀가하는 여인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평면 그림임에도 입체감을 살리고 있다. 

대표작 ‘빨래터’(1950년대)는 여러 점 그렸는데 그중 한 점이 2007년 당시 한국 작가 중 경매 최고가(45억2000만원)를 기록했다. 그가 빨래터를 자주 그린 것은 아내 김복순을 처음 본 추억의 장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각선 구도에 각기 다른 여인들의 뒷모습에 노랑, 분홍, 옥색 등 색을 입혀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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