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활사박물관 ‘세대 공감-최달용의 서울살이’ 전, 해방둥이의 옛 물품이 전하는 1950~70년대 추억
서울생활사박물관 ‘세대 공감-최달용의 서울살이’ 전, 해방둥이의 옛 물품이 전하는 1950~70년대 추억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1.01.29 15:19
  • 호수 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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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도입부에서 상영 중인 ‘그때의 청년이 지금의 청년과 마주하다’의 한 장면.
전시 도입부에서 상영 중인 ‘그때의 청년이 지금의 청년과 마주하다’의 한 장면.

최달용 어르신 기증품 90여점 통해 한국전쟁 이후 격변의 시대 조명

지금은 사라진 ‘공전식 전화기’, 버스토큰, 주택복권 등 옛 향수 불러

[백세시대=배성호기자] 한때 발명가를 꿈꾸다 변리사가 된 최달용(76) 어르신은 자신의 초등학교 졸업장부터 혼수용품에 이르기까지 개인 자료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 제품 등 평생 모아온 물건 1181건을 2013년 서울생활사박물관에 기증했다. 그의 크고 작은 기증품은 20세기 중후반 급변했던 서울의 한 단면을 보여줬고 박물관의 크고 작은 전시를 통해 소개되면서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해방둥이’ 최 어르신의 기증품을 중심으로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서울 소시민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전시가 서울생활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오는 3월 28일까지 진행되는 ‘세대 공감-최달용의 서울살이’ 전에서는 기증 자료 90여점과 당시의 시대상을 담은 유물 80점을 통해 산업화 세대의 애환을 살펴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맨먼저 ‘그때의 청년이 지금의 청년과 마주하다’라는 영상이 상영된다. 이 영상은 서울이라는 동일한 공간 속에 다른 시대의 청년이 서로 마주보는 장면을 통해 세대 간의 공감을 이끈다. 

이어지는 ‘사회학자의 서재’에서는 1950년대부터 70년대의 주요 사건들을 유물과 함께 조망한다. 전쟁 직후의 서울은 어수선했다. 전쟁으로 도심은 폐허가 되었고, 행정력이 미비한 가운데 이재민과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형성된 무허가 불량주택들이 도시 곳곳에 난립해 있었다. 4·19 혁명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으로 바뀌면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다.

이후 1960~70년대 한국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서울은 폭발적인 인구증가와 급격한 도시화를 경험했다. 그 결과 각종 도시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불도저’ 김현옥 시장이 등장한 이래, 지속되는 개발독재 시정기를 거치면서 서울의 도시경관은 급격히 변모해갔다. 이 시기 제작된 군사혁명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 자료, 새마을의 노래 레코드판과 화보, 수출의 노래 악보 등이 치열했던 당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피난 셋방살이에서 변리사가 되기까지’에서는 해방둥이 최달용 어르신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소시민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최달용 어르신은 광화문 인근에서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5살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는데, 그는 전쟁을 느닷없이 쏟아지는 폭격의 공포와 시시때때로 울리는 사이렌 소리의 불안감으로 기억하고 있다. 

종전 이후 최 어르신은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와 신당동의 다세대 주택에서 십여 가구와 함께 살았다. 국민학교 6학년인 1958년에 드디어 정규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입시지옥’으로 일컬어지는 10대 학령기를 거쳤다. 전시에서는 최 어르신이 당시 수집한 졸업장 등의 자료를 토대로 지금과 다르지 않은 입시 열기를 살펴본다. 그가 받은 일부 우등상장과 졸업장의 경우 서기가 아닌 단기로 날짜를 기록한 것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가난한 가정 형편에도 굴하지 않고 최 어르신은 학업을 마쳤고, 취업과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일궜다. 시련과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에 성공한 해방둥이들의 삶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이로운 성취를 이룬 당시 한국사회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특히 현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소시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물품이 눈길을 끈다. 대표적인 것이 가정용 전화기다. 1990년대 후반부터 개인 휴대폰 보급이 늘고 2010년대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가정용 전화기는 빠르게 사라져갔다. 특히 다이얼 방식의 전화기는 현재 2030세대는 잘 모를 정도이다. 전시에서는 ‘체신1호 공전식 전화기’, ‘금성 다이얼식 전화기’ 등 70년대 가정의 필수품을 통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버스 토큰과 초창기 전기밥솥, 다리미, 토스터 등도 눈길을 끈다. 

또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내집마련 열풍이 1970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점도 인상적이다. 지금의 로또 역할을 했던 주택복권을 비롯해 당시 신문기사들을 통해 집을 소유하려했던 서울시민들의 욕구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로비 전시 공간에는 변리사로 일한 최 어르신이 수집해놓은 100여점의 아이디어 제품도 한께 소개한다. 지금은 흔히 쓰이는 빨래망과 콘센트 안전커버 등이 당시에는 획기적인 상품이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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