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고속도로를 달리며 / 신은경
[백세시대 / 금요칼럼] 고속도로를 달리며 / 신은경
  • 신은경 차의과대학 교수
  • 승인 2021.02.19 14:31
  • 호수 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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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차의과대학 교수
신은경 차의과대학 교수

운전 습관은 살아온 모양과 닮아

젊어서 시간에 쫓길 때는

과속한 적도 많았지만

지금은 2차선으로 달려야 편안

뒷차가 무례해도 양보하면 그만

운전한 지 30년이 넘었다. 운전은 내가 살아온 모양과 닮았다. 운전 길이 세상사는 길 같다. 나의 학교 출근길은 고속도로를 포함해 편도 55km이다. 마음이 평안하고 몸컨디션이 좋은 날이거나 삶의 속도가 그래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주중에는 주로 1차선을 선택한다. 그러나 생활에 시동이 잘 걸리지 않은 월요일 아침은 주로 2차선을 달린다. 아무래도 1차선은 긴장의 강도가 높은 라인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달리고 있건만, 갑자기 깜빡이도 안 켜고 훅 치고 들어오는 차가 있는가 하면, 나는 규정 속도로 달리고 있는데도, 바짝 뒤꽁무니에 붙어 빨리 비키라는 사인을 주는 차도 있다. 100km 속도제한인 고속도로에서 저리도 바짝 뒤쫓아 오면 어떡하라고. 혹시라도 내가 급브레이크라도 밟으면 어쩔 거냐는 말이다. 

2차선은 여유다. 조금 늦은 속도로 달려도 걱정이 없다. 2차선의 내 속도가 마음에 안 드는 뒷차는 스스로 1차선으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의치 않은 차량은 3차선으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가 내쳐 1차선으로 속도를 뽑아내기도 한다. 2차선을 선택해 달리는 날은 라디오 채널을 여유롭게 선택할 수도 있다. 목이 마르면 옆에 둔 물을 마실 여유도 있고, 붉고 노랗게 물들어 가는 산등성이의 가을빛에도, 아직 겨울눈이 녹지 않은 저 멀리 산꼭대기에도 잠시 눈을 돌릴 여유가 있다.

끼어들고, 뒤를 바짝 추격하는 차에 스트레스를 받느냐 안 받느냐 하는 건 전적으로 내게 달린 일이다. 아무리 무례하게 운전을 하는 차라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양보해 주면 된다. 늦잠을 자서 회의에 늦은 사람이겠거니, 못된 운전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이겠거니 하고 이해하면 된다.

내가 처음 운전을 시작한 것은 84년이었다. 당시 아나운서실의 여자 아나운서 중에서는 두 번째로 운전을 배우고 차를 산, 비교적 ‘얼리어댑터’였던 셈이다. 

입사한 81년부터 나는 저녁 9시 뉴스 진행을 하고 있었다. 뉴스가 끝나면 회사 차량이 편집부 직원을 모두 태우고 집집이 퇴근을 시켜줘 자가용이 필요 없었던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뉴스 진행자가 바뀌는 일이 생겼고, 나는 평일 낮에 출퇴근하는 사람이 되었다. 컬러TV 시대 프라임타임 뉴스앵커로 그동안 얼굴이 많이 알려졌는데,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자니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엄마는 내게 묻지도 않으시고 덜컥 흰색 포니 승용차를 할부로 계약해 오셨다. 갑자기 뉴스에서 밀려난 나를 위한 엄마의 위로 방식이었다. 나머지 할부금은 네가 벌어서 갚으라 하시면서. 새 차가 생겼지만, 면허가 있다고 즉시 운전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당시 KBS에는 우리 모두의 ‘김 기사님’이 계셨다. 모범 운전자 출신의 기사님이셨는데, 차량을 가진 직원들의 많은 민원, 말하자면 고장 수리를 하는 일이라든가, 시내 운전을 배우는 것이라든가 하는 일을 다 맡아 돌봐 주셨다. 나도 김 기사님께 주행 교육을 받았다. 

김 기사님의 특징은 무조건 1차선 선호. 초보운전이라고 벌벌 기어 다니는 걸 용납 못 했다. 기어 다니면 사고 나기 딱 좋게 된다며 1차선으로 무조건 들어가라 무섭게 명령했다. 김 기사님에게 운전 교습을 받은 동료들은 대부분 1차선 선호 운전습관이 있었다. 

운전이 손에 익을 즈음, 본의 아니게 난폭운전을 하기도 하였다. 운전을 시작한 지 3년쯤 지날 무렵, 나는 라디오 아침 뉴스 진행을 하게 되었다. 어리석은 젊은이였던 나도 마지막 5분까지 더 자려고 뭉개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 뛰쳐나가는 일이 허다했다. 7시 라디오 뉴스 생방송에 늦지 않으려고 서부간선도로를 미친 듯이 달려 여의도 방송국까지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날 엄마가 나를 불러 세우시더니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씀을 하셨다. 아침에 그렇게 무서운 속도로 차를 몰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아니 엄마가 어떻게 나의 운전행태를 아실까? 알고 보니 같은 아파트에 택시 기사 아저씨 한 분이 사셨는데, 새벽에 나의 운전하는 꼬락서니를 따라가 보다가 기가 막혀 혀를 차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우리 어머니에게 고해바친 것이었다. 

이렇게 난폭한 운전은 영국 유학을 하러 가서 많이 고쳐졌다. 영국은 일본처럼 왼쪽 주행이라 처음부터 다시 초보처럼 배워야 했다. 벨기에에서 온 친구는 운전대 앞에 큰 종이에 뭐라고 크게 써 붙이고 다녔다. 불어인 것 같아 무슨 뜻이냐 했더니, Drive Left! 왼쪽으로 운전해! 라는 뜻이라고 했다. 

세월이 가고 삶의 모습이 변함에 따라 운전 모습도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요즘은 내가 학교 가는 날이면 남편이 먼저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걸어둔다. 엔진을 미리 가동하고, 시트도 핸들도 따끈하게 만들어 준다. 차에 타면 겨울날 따뜻한 군고구마를 잡을 때 같은 안온한 느낌이다. 그리고 차가 떠날 때면 ‘운전 조심해’라고 당부한 후, 그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빠이빠이를 해 준다. ‘조심해서 운전해요’ ‘핸드폰 들여다보지 말고’라고 또 당부한다. 예전 같으면 내가 운전 경력이 몇 년인데 잔소리하느냐고 생각했겠지만, 이젠 그 말들이 모두 다정하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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