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관 덕수궁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 암울한 일제강점기 속 우정 꽃피운 화가와 문인들
현대미술관 덕수궁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 암울한 일제강점기 속 우정 꽃피운 화가와 문인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1.02.19 15:22
  • 호수 7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제에 탄압 속에서도 왕성하게 교류하며 예술혼을 꽃피웠던 화가와 문인들의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사진은 이중섭이 친구인 구상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그림 ‘시인 구상의 가족’(1955).
이번 전시에서는 일제에 탄압 속에서도 왕성하게 교류하며 예술혼을 꽃피웠던 화가와 문인들의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사진은 이중섭이 친구인 구상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그림 ‘시인 구상의 가족’(1955).

문인과 신문 삽화작가들이 만나 탄생시킨 특별한 결과물도 선봬

구본웅이 그린 이상 초상화, 장욱준‧김환기가 출간한 수필집 등 눈길

[백세시대=배성호기자]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선구자였던 구본웅(1906~1953)은 1935년 ‘친구의 초상’을 그린다. 구본웅 특유의 강렬한 색채 대비로 표현한 초상화 속 인물은 ‘천재 시인’ 이상(1910~1937)으로, 창백한 낯빛임에도 불구하고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한다. 

이상의 작품에도 구본웅이 등장한다. 소설 ‘봉별기’에서 ‘나와 농(弄)하는 친구’로 묘사한 ‘화우 K군’이 그다. 두 사람 외에도 수많은 미술가와 문인들이 예술적 교류를 하며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를 버텨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진행되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에서는 이처럼 일제강점기와 광복의 시기 문학과 미술의 특별했던 관계를 조명한다. 오는 5월 30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서는 미술 작품 140여점과 서지 자료 200여점을 통해 새로운 길을 탐색하는 문인과 화가들의 끈끈한 교류와 창조적인 교감을 살펴본다.

전시는 1930년대 글과 그림을 넘나드는 융합형 예술가들의 실험적 시도를 살펴보는 ‘전위와 융합’, 1920~1940년대 문인과 화가의 만남을 매개한 신문소설과 책에 집중한 ‘지상(紙上)의 미술관’, 예술가들의 남달랐던 우정에 주목한 ‘이인행각’, 그리고 화가이면서 글솜씨도 탁월했던 작가들을 소개하는 ‘화가의 글·그림’ 등으로 구성된다.

먼저 ‘전위와 융합’에서는 1930년대 이상이 경성 종로에서 운영했던 다방 ‘제비’를 배경으로 당시 예술가들이 시도한 예술적 실험을 조명한다. 이곳에서 박태원, 김기림 등 문인과 구본웅, 길진섭, 김환기 등 화가들은 문학과 미술, 음악과 영화에 대한 담론을 펼쳤다. 

구본웅이 그린 ‘천재 시인’ 이상의 초상화인 ‘친구의 초상’(1935).
구본웅이 그린 ‘천재 시인’ 이상의 초상화인 ‘친구의 초상’(1935).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구본웅의 ‘인형이 있는 정물’(1937)이다. 이상이 운영하던 다방에 걸려 있던 것으로 테이블 위에 신문과 잡지, 목각 인형과 과일이 아무렇지 않게 겹쳐져 놓여 있는 것을 그린 작품이다. 작품 속에는 프랑스의 유명한 미술 잡지가 있는데 다방에 모였던 화가와 문인들이 프랑스의 미술, 영화, 문학 등을 통해 서양 예술과 간접적으로 교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지상의 미술관’에서는 1920~40년대를 중심으로 한 ‘인쇄 미술’의 성과를 보여준다. 3·1운동 이후 설립된 민간신문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문인들과 당대 최고의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신문소설의 삽화가들이 만나 이루어낸 특별한 결과물이 소개된다. 안석영·노수현·이상범·정현웅·이승만·김규택을 비롯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삽화가들의 흔적을 풍부하게 만나볼 수 있다.

이 시기 신문사의 자매지로 발간된 잡지에서는 문인과 화가의 결합을 통해 아름다운 ‘화문(畵文)’이라는 장르가 만들어졌는데, 이 시기 잡지를 통해 처음 발표된 시의 원전(原典)과 독창적 감성으로 충만한 그림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도서관처럼 꾸며진 전시관에서는 희귀한 책들을 만날 수 있다. 윤동주도 필사해서 봤다는 100부 한정판인 백석의 ‘사슴’을 비롯해 김소월의 ‘진달래꽃’, 서정주의 ‘화사집’ 등 당대 수많은 문예인을 감동시킨 책들의 원본을 감상할 수 있다.

‘이인행각’에서는 1930~50년대 문인과 화가들의 개별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 종교를 매개로 절대적인 정신 세계를 추구했던 시인 정지용과 화가 장발의 만남을 시작으로, 조선일보사 편집실의 옆자리에 앉아 순박하고 아득한 시의 세계를 갈구했던 시인 백석과 당대 최고의 삽화가였던 정현웅의 조우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일보의 사회부장과 신입 기자로 처음 만난 이여성과 김기림의 만남이 흥미롭다. 일본 유학시절에 낭만주의적 예술관을 공유했다가 결국 조선의 ‘옛것’이 주는 아름다움에 심취했던 이태준과 김용준의 교류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화가의 글·그림’에서는 화가로 알려졌지만, 문학적 재능 또한 남달랐던 예술가 6인의 글과 그림을 함께 보여준다. ‘근원수필’의 저자로 소박하고 진솔한 수필가로 더욱 유명한 근원 김용준, ‘강가의 아틀리에’라는 수필집을 통해 언제나 단순하고 순수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화가 장욱진, 따뜻한 시선으로 한국전쟁 이후의 일상과 삶을 담아낸 한묵의 글과 그림이 각각 전시됐다. 

또한, 많은 문학인의 친구로 평생 자연과 산을 사랑했던 화가 박고석, 자전적이며 인간 내면의 감정에 솔직한 수필로 더욱 대중적 사랑을 누렸던 천경자, 마지막으로 1930년대부터 잡지에 화문을 싣기 시작해 그림만큼이나 감동적인 일기와 편지, 수필을 남겼던 화가 김환기의 작업물도 소개된다.     

배성호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