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 우남 이승만 前 대통령 ②
[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 우남 이승만 前 대통령 ②
  • 관리자
  • 승인 2006.08.28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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利他的 유쾌한 스트레스 ‘건강의 비결’

정권후반기 인의장벽에 가려 전횡 못막아
장개석에 “민주주의 의지강한 학생 많아 장래밝다”

 

본지는 우리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대개 장수하는 데 주목하여 은퇴한 노인으로서 겪는(은) 일상의 작은 행복과 세월의 무상함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지면을 마련했습니다. 공과 과가 있겠으나 어차피 전직 대통령들은 역사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편향성 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선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간적인 관심사와 삶의 즐거움, 건강생활, 원로로서의 자리 등을 살펴보고 건강 노년, 문화노년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첫 번째로 이승만 전대통령을 4회 연속 게재합니다.

해로하는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알려져 있다. 유전생물학적 소인이 없다고 하여도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식습관과 세상에 대한 태도 등 생활을 맞춰나가는 사이 외모도 닮아간다는 것이다. 이인수씨가 양아버지 이승만 전대통령과 닮은 이유도 그렇게 설명이 될 수 있겠다.

 

이 전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나이가 지금 이인수씨와 비슷한 74세였다. 정정함도 정정함이거니와 백발과 얼굴 윤곽, 이미지가 무척 닮아 보인다. 우남기념사업회와 같은 이 전대통령과 관련된 일을 하며 45년여를 이화장에서 지내는 동안 이 전대통령을 닮게 된 것이리라.

 

“역사적으로 큰 인물은 대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인수씨는 이승만 전대통령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인물이라고 말한다.

 

청년시절의 구국운동, 나라를 잃었을 때의 독립운동, 광복 후의 건국운동 등 민족과 국가를 위해 누구보다 큰일을 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운명적으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잃어버렸던 나라를 되찾아준 분입니다. 오늘날 이만큼 경제발전을 한 것도 다 그 어른이 기초를 튼튼히 했기 때문입니다.”

 

뒤에 다시 다루겠지만,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도 실은 이 전대통령 때인 1959년에 이미 기초가 성안돼 있었다. 이 기초 위에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수립되고 시행된다.

 

이인수씨는 이 전대통령이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결단을 하여 미국으로부터 얻어낸 한미상호방위조약도 한국 경제발전에 큰 힘이 됐다고 말한다. 미국의 우산 아래에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논리다. 이 전대통령의 아들로서의 생각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기도 하다.

 

“몸에 좋은 이타적(利他的)인 유쾌한 스트레스 많았을 것” 아들 인수 씨 꼽아  

 

“우리 국민들은 적어도 ‘이 박사’가 국민을 나쁜 길로 끌고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고 이인수씨는 말하며, “정권 후반기에 인의 장막에 가려서 휘하 측근들의 전횡을 막아내지 못한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지만, 적어도 어른의 진심은 늘 우리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았어요”라고 말했다.

 

4·19를 보는 이 전대통령의 입장도 민족사적으로 볼 때 큰 인물임을 알게 해주는 증거라고 한다. 하야 직후 이화장에 머물게 되었을 때 대만의 장개석 총통으로부터 위로전문을 받고는 “민주주의를 하려는 의지가 강한 학생들이 있어서 한국의 장래가 밝다”고 답신을 보냈을 정도였다. 학생들에 대한 원망은커녕 학생들의 정의감에서 미래의 나라발전을 내다본 것은 큰 사람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청년학생들의 운동에서 희망을 보았던 것은 이 전대통령 자신이 청년시절 구국운동을 했던 경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던 구한말의 자신처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4·19 청년학생들의 진정성을 이 전대통령이 읽었으리라는 것이다.

 

대통령 재임 12년 동안 국부로 추앙받았던 만큼 권좌에서의 하야는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가 되었을 법하다. 그런데도 이 전대통령이 하야의 충격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일신의 고통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대의라면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청년시절에 겪은 수년 동안의 감옥생활,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등 몸이 편할 날이 없었음에도 비교적 건강하게 90까지 장수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을 법하다. 권좌에서 물러난 충격 속에서도 사적인 욕심이나 증오심이 아니라 이타적(利他的)인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을 썼던 것이 유쾌한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화가 나고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고문 후유증 나타나 

 

그렇다고 이승만 전대통령이 화를 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지시 사항을 잘 받들지 못했거나 이 전대통령의 뜻에 반하는 일이 발생할 경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전대통령이 화를 내는 경우 몸을 감추고 숨었다가 화가 가라앉은 뒤에 나타나곤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화를 낸 뒤끝이 없어서 화가 가라앉은 뒤에 나타나면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전대통령이기도 했다. 

 

이 전대통령은 화가 나고 스트레스가 받치면 볼의 근육이 떨리고, 손가락 끝을 후후 불었다. 청년시절 옥고를 치를 때 손톱 밑을 대까지로 찔리는 고문을 당했던 후유증이었다고 한다. 화가 나면 그 손톱 밑이 고문을 당하는 듯이 아프고 화끈거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혹독한 고문을 이겨낸 시국사범 혹은 정치사범 출신으로, 해외를 떠돌며 나라의 독립이라는 비장하고 무거운 활동을 전개하면서도 그는 유머를 잃지 않고 재미있는 이벤트를 많이 주도했다.  

 

아들 이인수씨, 며느리 조혜자씨가 이전대통령과 함께 살았던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1961년에 만났으니 1965년 타계 때까지 4년여 동안 아들로 살았는데, 그나마도 인수씨가 한국에 드나들고 뉴욕에서 공부하느라고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많았다.

 

그러니 청년시절의 이 전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 이인수씨는 말해줄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이 전대통령과 1932년에 만나 해로한 프란체스카 여사가 아들 부부와 해로하면서 남긴 뒷이야기는 많이 있다.

 

생전에 프란체스카 여사가 들려주었다며 전하는 말이, “참으로 유머러스한 분이었다”고 했다. 92세까지 수를 한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전대통령과의 단란했던 추억들이 많았다고 한다.

 

유머가 풍부한 재미있는 지도자 

 

이 전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한 이유에 대해서도 유머러스하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체구가 작아서 밥을 적게 먹을 것이니 힘 안 들이고 부양할 수 있을 것 같았다”는 이 전대통령은 그녀가 자신의 유머를 받아주고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어서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 유머러스함이 있었기 때문에 33세의 젊은 여성 프란체스카가 58세의 노 독립운동가와 사랑을 나눌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덜 늙고 또 왕성하게 독립운동을 했으리라는 분석도 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아들 내외에게 들려준 재미있는 일화가 많았는지, 이인수 씨는 마치 이 전대통령에게서 직접 들은 듯이 독립운동 시절을 전한다.

 

“하와이 기독교한인회 활동을 하면서, 독립성금으로 성미를 모으고 했을 때, 연극 같은 이벤트를 자주 하여 사람을 모았다고 해요. 얼마나 재미있고 웃겼던지 그런 행사가 있을 때 교민들이 너무너무 좋아했다는 거예요.” 며느리 조혜자씨의 말이다.

 

“한번은 ‘시집가는 날’이라는 연극을 한 적이 있었대요. 남자는 말을 타고, 여자는 가마타고 가는 전통혼례식인데, 얼마나 상황이 웃겼던지 배우가 말위에서 오줌을 싸 버렸을 정도라고 해요.”

 

이 전대통령은 이벤트를 기획하는 능력 뿐 아니라 연기력도 있었다고 한다. 행사가 있으면 뒤풀이를 하면서 제비뽑기를 하여 벌칙으로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대로 ‘개인기’를 발휘하게 한 적이 있는데, 한번은 이 전대통령이 뽑힌 적이 있었다. 사양하지 않고 그는 즉석에서 담뱃대를 문 옛 양반흉내를 냈다고 한다. 볼을 발씸거리며 에헴, 에헴 하는 코믹한 연기를 하여 좌중을 자지러지게 했다는 것이다.

 

이인수씨는 “청교도적으로 성실하고 근엄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간적인 친화력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존경받았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경무대에서 각료 회의를 할 때도 그렇게 좌중에 유머러스한 말을 많이 했다고 해요.”

 

그런데 ‘큰 인물 이승만’ ‘유머러스한 대통령’ 이미지를 무색하게 하는 문서가 지난 2월 22일, 국가 기록원에서 발굴돼 눈길을 끈다. (계속) 

 

박병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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