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매드랜드’, “정처 없이 떠돌아도 이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
영화 ‘노매드랜드’, “정처 없이 떠돌아도 이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1.04.02 14:55
  • 호수 76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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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미국인 클로이 자오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와 함께 아카데미 주요 부문 후보에 올라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극중 한 장면.
중국계 미국인 클로이 자오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와 함께 아카데미 주요 부문 후보에 올라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극중 한 장면.

개조한 밴 타고 미 전역 유랑하는 여성 통해 현대 사회문제 담아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아카데미상 놓고 ‘미나리’와 각축

[백세시대=배성호기자] 2021년, ‘차박의 시대’라 불릴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이용한 캠핑을 즐기고 있다. 주말이면 공기 좋고 물 좋은 산과 바다로, 바퀴 닿는 곳이면 어디든 떠나 치유의 시간을 가진다. 그런데 이 ‘차박’이 여가생활이 아닌 생존을 위한 선택이라면 과연 ‘펀’(fun, 즐거움)할 수 있을까. ‘펀’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영화 한 편이 개봉한다. 올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미나리’의 최고 경쟁작으로 주목받는 영화 ‘노매드랜드’ 이야기다.

지난해 9월 막 내린 제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대상격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영화 ‘노매드랜드’가 4월 15일 개봉한다. ‘파고’(1997)와 ‘쓰리 빌보드’(2018)를 통해 두 차례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제작과 함께 또다시 인생 연기를 선보여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연출을 맡은 중국계 미국인 클로이 자오 감독 역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려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과 수상을 놓고 격돌해 주목받고 있다.

작품은 일자리가 사라져 사람들이 모두 떠나 폐허가 된 마을에 거의 유일한 주민인 ‘펀’(프랜시스 맥도먼드 분)이 한 창고에 자신의 살림살이를 맡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사별한 남편의 옷 냄새를 맡으며 잠시 슬픔에 빠져있던 그녀는 이내 창고 문을 걸어 잠그고 숙식할 수 있도록 개조한 밴에 필요한 가재도구만 싣고 마을을 떠난다.

이때부터 그녀는 일자리를 찾아 유랑하는 자동차 유목민(노마드, Nomad)이 된다. 펀은 ‘아마존’ 같은 대기업의 물류창고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캠핑장 이용료를 내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하지만 밤이면 찾아오는 지독한 외로움과 비좁은 차에서 잠을 자는 것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한파라도 찾아오는 날에는 그 고통은 배가됐다.

그러다 함께 일하던 동료를 통해 슬기롭게 유랑하는 노하우를 알려주는 ‘밥 웰스’를 알게 되고 그의 유랑자 모임에 합류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다양한 이유를 가지고 정처 없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알게 된다. 

2008년 금융위기로 직장에서 잘린 후 모든 것을 잃고 생을 마감하려다 반려견 때문에 마음을 고쳐먹고 여행에 나선 사람, 동료의 죽음으로 잘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길 위에 오른 사람, 부모와 함께 여행에 나섰으나 둘 다 암으로 잃고 혼자가 된 사람,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고 멋지게 삶을 마무리하고자 차를 끌고 나온 사람 등 사연도 제각각이다. 펀은 이들에게서 생존을 위한 다양한 팁을 배우며 유목민으로서 한 단계 성장한다.

길 위의 만남은 이별로 이어지고 다시 혼자 남은 펀. 그녀는 본격적인 자동차 유목민으로 미 전역을 떠돈다. 낮에는 일을 하고 오후와 주말에는 그 지역 명소를 돌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힌다. ‘데이브’라는 또 다른 방랑객과 묘한 관계로까지 발전한다. 

펀을 유목민으로 만든 삶은 그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녀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밴이 망가진 것이다. 이로 인해 그녀는 유랑생활의 지속 여부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이번 작품에는 현재 미국이 처해 있는 다양한 문제가 녹아 있다. 대량의 실업난,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촉발한 부동산 문제, 빈곤으로 인해 계속해서 일해야 하는 노인문제 등을 스케치하듯 담아냈다. 그리고 이를 풀어내는 방법도 우아하다. 사회문제를 비판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주인공과 주변 인물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모는 과격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은 이러한 문제를 에둘러 말하면서 관객들이 스스로 영화속 문제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사회 밖으로 내몰린 이들의 선택을 비관적으로 다루지 않은 점도 매력이다. ‘펀’의 친언니를 비롯한 지인들은 그녀에게 자신들과 함께 살자고 계속해서 권한다. 하지만 펀은 ‘선구자’라 이름 붙인 자신의 밴과 함께 스스로 누구도 가보지 않았던 노년의 삶을 개척해나간다. 펀이 방황하는 어린 유목민들과 교감하는 장면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위로의 메시지도 전한다. 

물론 그 길이 편하지 않다. 좁은 밴에서 바구니에 볼일을 보고, 몸을 구겨서 자야 하는 험난한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펀을 비롯한 유목민들은 저마다의 신념으로 이를 이겨낸다. 그들은 지독한 자본주의로 인해 ‘광란의 땅’(mad land)이 된 미국이 낳은 피해자들이지만 “이 세상은 살아갈 만한 곳이지, ‘광란의 땅은 아니야’(No mad land)”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를 증명하듯 카메라는 인간의 자본에 물들지 않은 미 곳곳의 자연풍경을 쫓는다. 펀의 시선을 따라 끝없이 바다가 펼쳐진 캘리포니아 해안도시, 거대한 나무들로 가득한 핸디우즈 국립공원 등을 바라보면 이 세상은 험난하지만 그래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3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노리는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호연 또한 눈부시다. 그녀는 표정과 눈빛을 통해 일자리도, 남편도, 집도 모두 잃고 삶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펀을 완벽하게 연기해낸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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