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죽음 앞둔 여성 철학자의 마지막 편지
[백세시대 / 세상읽기] 죽음 앞둔 여성 철학자의 마지막 편지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1.04.09 13:57
  • 호수 76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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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성이 3개월여 스무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한 여자는 유방암 수술을 받은 뒤 다발성 전이로 죽음을 눈앞에 둔 미야노 마키코(1977~2019년)씨. 교토대 문학부를 나와 후쿠오카대학 부교수로 있는 철학자이다. 

또 다른 여성은 인류학자이자 전 국제의료복지대 대학원 부교수로 와세다대 인간과학부 스포츠과학과를 졸업한 이소노 마흐(45)씨. 이들의 인연은 2018년 ‘문예공화국 모임’에서의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됐다. 편지 왕래는 개요도 목적지도 정해두지 말고 그저 상대방이 내게서 이끌어낸 말을 글로 옮겨 주고받자고 미야노씨가 먼저 제안해 이뤄졌다.

미야노씨는 호스피스병원을 찾는 과정에서 겪은 우연과 필연의 선택에 대해 편지에 썼다. 그녀는 후쿠오카의 몇몇 병원을 둘러봤지만 “고르기 힘들어 선택하기도 지쳤어”라며 포기하고 만다. 교토로 돌아온 그녀는 우연히 어느 병원을 알게 됐고 그곳에서 돌봄의 방향을 계획하게 됐다. 그건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한 능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미야노씨는 이 과정에서 ‘애초에 선택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합리적으로 비교하고 검토할 수는 있겠지만 과연 우리는 정말로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무언가에 떠밀리는 식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면 선택을 능동적인 행위라 할 수 있을까? 그저 어떤 상태에 이르러 안정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죽음을 앞에 두고 ‘약한 운명론’에 휘말려 꼬일 대로 꼬인 나의 가능성을 풀어준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라 우연한 만남이 나의 현재와 미래에 밝은 빛을 비춰줬다는 것이다.

이소노씨는 세 번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미야노씨의 몸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사실은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지막 무기, 글로 세계를 그리는 힘은 아직도 당신 속에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그 힘이 제 눈에 보이는 한 저는 미야노 씨의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도망치지 마, 더 할 수 있어’라며 당신의 손을 잡아끌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역할입니다.”

미야노씨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기 위해 사유하고 글을 쓴다고 했다.  

“8년 전 오른쪽 유방을 전부 절제했을 때 저의 심신은 너무나 불안정했습니다. 잘라낸 오른쪽 유방은 제 피하지방으로 재건했기에 얼핏 보면 제 신체는 전과 다름없었습니다. 제 복부서 추출한 고깃덩이로 만들어낸 신경이 통하지 않는 유방, 물체로서 그 자리에 있지만 통증도 온도도 느낄 수 없고 그런 주제에 몸과 연결된 덩어리. 만질 수 있는 것이 있었지만 실재한다는 감각이 동반되지 않아 무언가 결락된 상태였습니다. 거기에 내가 있는데 없다. 여러 번 손을 대어 만져보아도 오른쪽 유방에는 감각이 없었습니다. 제 몸이 거기서 잘린 듯 했습니다.(중략)무섭습니다. ‘지금과 다를 수 있었다’는 가능성 따위가 아니라 무(無)속으로 제가 빨려들 것만 같습니다. 그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저는 생각하고 글을 씁니다. 그럼으로써 간신히 삶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고통과 죽음 속에서 나를 되찾고 계속 나로서 있기 위해 글을 씁니다. 이를 철학하는 이의 업이 아닌 다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미야노씨는 이소노씨와 나눈 짧지만 강렬한 인연에 대한 기쁨과 감회도 편지에 남겼다. 그녀는 마지막 편지에 “운명을 살아간다는 것은 세계를 향해 뛰어드는 것입니다. 뛰어드는 순간 우리는 이 세계가 온갖 우연이라는 만남에서 ‘나’를 발견해내어 새로운 ‘시작’이 태어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쩜 세계란 이토록 경이로울까요. 저는 시작을 앞에 두고 사랑스러움을 느낍니다. 우연과 운명을 통해서 타자와 함께 하는 시작으로 가득한 세계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제가 지금 도달한 결론입니다”라고 썼다.  

두 사람은 2019년 4월부터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고 출판사 경영자의 주선으로 편지들을 모아 책(‘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다다서재)으로 내게 됐다. 원제는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다’이다.

여성 철학자는 그냥 쓰러지지 않았다. 감염증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간 이후에도 대학교의 기말시험 출제를 마쳤고 7월 6일 책의 서문까지 직접 쓴 후 출간을 보지 못한 채 7월 22일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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