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족상도례’로 처벌 어려워… 통장 맡길 경우 정기적으로 내역 확인해야
‘생활경제지킴이’ 통해 상담받고 ‘통장관리서비스’ 신청하는 것도 효과적
[백세시대=배성호기자] 이명숙(76‧가명) 어르신은 최근 믿었던 아들의 배신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사별한 남편이 남겨준 주택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는데 아들이 부양을 약속하며 집을 처분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지병 때문에 힘들어하던 이 어르신은 제안을 수락해 집을 팔아 돈을 넘겼는데 이때부터 아들이 돌변했다. 경제적 지원도 하지 않고 연락마저 끊긴 것이다. 이 어르신은 “병원비를 낼 돈도 없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노인학대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른 가운데 경제적 학대 신고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어르신들의 경우 젊은 사람들에 비해 경제적 회복이 어려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경제적 학대란 피해자의 금전이나 재산을 허락 없이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노인 대상 경제적 착취는 ▷현금·신용카드 등을 강제로 가로채 사용하는 유형 ▷동의를 받지 않은 예금 인출과 부동산 명의 이전·대출 등 법적 권리를 침해하는 유형 ▷감정에 호소해 노인 스스로 경제적 지원을 유도하는 유형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WHO 추산 국내 50여만명 위험 노출
복지부가 지난해 발표한 ‘2019 노인학대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노인학대 신고 건수는 1만6071건으로 전년(1만5482건)보다 3.8% 증가했다. 문제는 ‘허락 없이 연금, 임대료, 재산 등을 가로챈다’. ‘빌린 돈을 갚지 않는다’, ‘귀중한 물건을 돌려주지 않는다’ 등 노인을 대상으로 한 경제적 학대 사례가 426건으로 전년도(381건)보다 11.8%나 증가한 점이다. 다만 신고를 꺼리는 것을 감안하면 경제적 학대를 당하는 어르신들의 사례는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실제 세계보건기구(WHO)는 노인인구의 약 6.8%가 경제적 착취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우리나라 노인인구에 적용하면 50만명 이상이 학대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상당수가 가족들에 의해 벌어져서 우리나라의 경우 ‘친족상도례’ 규정 때문에 형사 처벌이 어렵다. ‘친족상도례’ 규정은 ‘법은 문지방을 넘지 않는다’는 고대 로마법 정신을 구현한 것으로, 친족 사이의 재산 문제에는 국가형벌권 발동을 되도록 자제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직계혈족, 배우자, 동거친족 등 친족 간 발생한 재산범죄의 형을 면제하는 규정으로,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들어간 이후 고쳐지지 않았다. 법률구조공단에 따르면 친족상도례 관련 상담은 해마다 수백 건씩 접수되고 있다.
로마법에선 국가 대신 가장이 ‘가장권’으로 식구들에게 형벌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대가족이 해체돼 가족끼리 발생하는 재산 다툼을 조정해줄 수 있는 집안 어른도 없는 데다, 가족 간 재산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해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위헌 여부를 판단해 달라는 헌법소원이 제기된 상태다.
가족 뿐만 아니라 간병인 등 지인들에 의한 경제적 학대도 늘고 있다. 복지급여 신청이나 생활비 지출 등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통장이나 비밀번호, 도장 등을 요구해 피해를 보는 어르신들의 사례가 많다.
경제적 학대를 예방하기 위해선 아무리 믿을 만한 사람이라도 통장이나 도장 등을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 절대 넘겨주면 안 된다. 만약 부득이하게 통장관리를 타인에게 맡길 경우 내역을 정기적으로 관리하는 등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현재 금융권에서는 일정 금액을 설정하고 설정된 금액 이상으로 인출 시에는 거래가 정지되거나 사전에 등록한 보호자에게 통보되는 통장관리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는데 이를 활용하는 것도 좋다.
만약 본인이 복지급여나 생활비를 관리하기 어려운 경우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노인보호전문기관에서 운영하는 ‘생활경제지킴이’가 대표적이다.
‘생활경제지킴이’란 금융권 퇴직자들로 구성된 일종의 자문단으로 취약노인 가정에 파견돼 생활비 설계서비스, 금전관리 상담 등을 제공한다.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에서 운영하는 노인학대 신고전화(1577-1389)를 이용하면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민사소송 통해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가능
노인들이 경제적 학대에 맞설 ‘법적 카드’가 없는 건 아니다. 타인이 현금·신용카드 등을 강제로 가져가 쓰거나 본인 동의 없이 예금을 인출하고 부동산 명의 이전, 대출 등을 했다면 노인복지법 위반이나 사기 등의 혐의로 상대방을 신고할 수 있다. 또 시간과 비용이 들지만 민사소송을 통해 부당이득금 반환이나 손해배상 청구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감정에 호소해 노인이 스스로 돈을 내놓도록 유도하는 교묘한 착취에는 손 쓸 방도가 없다. 처벌도 어렵고 노인 스스로도 굳이 피해 사실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실제로 상당수 어르신들이 자식들의 경제적 학대를 감싸다 재산을 모두 잃고 심지어 개인파산을 신청하는 사례도 적지 않아 이에 대한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