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봉한 명작 ‘화녀’, 순박했던 시골 소녀는 어쩌다 불같은 ‘火女’가 됐나
재개봉한 명작 ‘화녀’, 순박했던 시골 소녀는 어쩌다 불같은 ‘火女’가 됐나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1.05.07 15:03
  • 호수 76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개봉한 ‘화녀’는 순수한 시골 처녀에서 광기 어린 여성으로 변모하는 ‘명자’를 통해 산업화와 가부장제에 희생된 여성들을 조명한다. 사진은 극 초반 순수했던 모습(왼쪽)과 후반 분노 가득한 ‘명자’를 연기한 20대 시절 윤여정의 모습.
재개봉한 ‘화녀’는 순수한 시골 처녀에서 광기 어린 여성으로 변모하는 ‘명자’를 통해 산업화와 가부장제에 희생된 여성들을 조명한다. 사진은 극 초반 순수했던 모습(왼쪽)과 후반 분노 가득한 ‘명자’를 연기한 20대 시절 윤여정의 모습.

김기영 감독이 출세작 ‘하녀’를 리메이크한 작품… 윤여정‧남궁원 주연

순결 잃고 폭주하는 명자 통해 산업화, 가부장제에 희생된 여성 묘사

[백세시대=배성호기자] 평범한 시골 소녀 ‘명자’(윤여정 분). 그녀는 친구 ‘경희’와 함께 무탈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성이 그녀를 겁탈하려고 시도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 일로 인해 그녀는 쫓겨나듯 서울로 떠나야 했다. 가정부로 지내면서 살림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위해 억척스럽게 장을 보는 순박한 소녀였다. 헌데 그녀는 불과 얼마 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오스카상 수상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윤여정의 영화 데뷔작 ‘화녀’(1972)가 재개봉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화녀’는 한국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기영 감독의 작품으로, 김 감독이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해준 출세작 ‘하녀’(1960)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이야기의 틀은 비슷하지만 ‘하녀’보다 기괴하고 잔인하게 심리적 파국을 강조한다. 김 감독의 ‘화녀’를 공개한 이듬해 윤여정과 다시 손잡고 ‘충녀’(1972)를 연출하며 여성 3부작을 완성한다. 

여성 3부작은 가부장제와 산업화 물결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과 충돌로 인해 희생되는 여성들의 비애를 기괴한 화면구성과 치정극 스토리로 담아냈다. 현재까지도 봉준호, 박찬욱 등 세계적인 감독에게 큰 영감을 주며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작품은 긴장감을 높이는 음악과 함께 한 살인사건 현장을 비추며 시작된다. 현장에는 집주인과 가정부가 살해돼 있었고 경찰은 범인을 찾고자 고군분투한다. 한 청소년이 범인임을 자백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사는 집주인의 아내를 강력한 범인으로 의심하며 추궁한다. 

이후 영화는 명자의 시골 생활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구와 함께 도망치듯 시골을 떠난 명자는 양계장 집 주인 ‘정숙’(전계현 분)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간다. 명자는 정숙이 좋은 데로 시집을 보내준다는 약속을 믿고 무보수로 일을 한다.

정숙은 경제력이 떨어지는 작곡가 남편 ‘동식’(남궁원 분)을 대신해 양계장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간다. 그러던 어느 날 정숙이 친정에 간 사이 한 가수 지망생이 동식의 곡을 받기 위해 그를 유혹한다. 이때 명자가 끼어들어 지망생을 내보내지만, 동식이 명자를 겁탈하고 결국 그녀는 임신하게 된다.

동식은 정숙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녀는 강제로 명자의 애를 낙태시킨다. 순결을 잃은 명자는 순박한 소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사랑에 목말라하는 악녀로 돌변한다. 정숙이 아픈 자신을 돌보지 않자 화가 난 명자는 분풀이로 동식의 아들을 죽인다. 정숙 역시 앙갚음을 위해 명자를 쥐약으로 독살하려 하지만 되레 명자의 음모에 걸려들어 궁지에 몰린다.

하지만 명자는 끝내 잔혹한 운명에 휘말린다. 자신을 협박한 직업소개소 사내를 살해하게 되고, 경찰에 추격을 받게 되면서 동식과 함께 약을 먹고 자살한다. 정숙은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강도가 침입한 것처럼 꾸미지만 모든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녀 역시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작품은 중산층 가정과 시골 처녀의 계급적 대립, 성적 억압, 성격 파탄 등 보통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감춰진 욕망의 어두운 모습을 그려냈다. 그리고 이는 수많은 명장면과 명대사를 통해 탄생한다. 양계장이라는 공간의 기괴한 느낌, 찬장에서 꺼내는 커다란 쥐, 거울 뒤의 정사, 이미지들이 거칠게 충돌하는 몽타주 그리고 전설의 계단 장면과 “저를 호적에 넣어주실 수 있겠어요?” 같은 대사 등은 다시 봐도 새롭고 기발하다. 

명자 역을 맡은 윤여정의 호연은 몰입도를 높인다. 첫 번째 작품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표정을 반복하지 않고 장면마다 새로운 얼굴을 연기하며 순박한 소녀에서 악녀가 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작품성을 인정받아 김기영 감독은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윤여정은 스크린 데뷔작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과 스페인 시체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