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경복궁을 다시 본다”
[백세시대 / 세상읽기] “경복궁을 다시 본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1.05.14 13:47
  • 호수 77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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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을 무상으로 출입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노인이 된 덕이다. 최근 경복궁을 가보고 두 가지 면에서 놀랐다. 하나는 경복궁이 임진왜란(1592~1598년) 당시 전소된 이후 무려 270여년이나 폐허가 된 채 방치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건물 사용 기간보다 빈 공간이었던 시간이 더 길었던 셈이다. 서울 한복판 43만2703㎡, 약13만8000평의 광범위한 땅이 3세기 가까이 공터였다는 사실이 선뜻 믿기지 않았다. 

또 다른 사실은 경복궁을 불태운 건 왜적이 아니라 우리 백성이었다는 점이다. 

조선 왕조 500년을 상징하는 경복궁은 조선 개창 4년, 1395년(태조 4년)에 지어졌다. 임금이 집정하던 근정전, 임금의 침소인 강녕전, 중전 처소인 교태전, 연회 장소인 경회루, 옛집현전이던 수정전 등 7225칸의 전각이 들어섰다. 

경복궁이 백성들의 손에 의해 소실됐다는 역사적 근거는 선조 때 문신 이기의 기록에서다. 이기는 ‘송화잡설’에서 “피난 가는 임금의 수레가 성문을 막 나섰고 왜적들은 도성에 들어오기도 전에 성안 사람들은 궐내에 다투어 들어가서 임금의 재물을 넣어두던 창고를 탈취했다. 그로도 모자라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등 세 궁궐과 6부, 크고 작은 관청에 일시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쳐 한 달 넘도록 화재가 이어졌다. 백성의 마음은 흉적의 칼날보다 더 참혹하다”고 썼다.

왕이 없는 궁궐은 신분제로 억눌리며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왔던 백성들의 한풀이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왜군이 한양을 점거했지만 백성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았고 일상생활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시장은 평소처럼 열렸고 물자도 정상적으로 교역됐다. 한양에 들어온 왜병들과 술판을 벌였고 서로 왕래하면서 도박까지 했다고 한다. 하급관리였던 성세령·세강도 한양에 남아 왜군에게 항복했다. 성세령은 손녀를 왜장에게 줘 귀여움을 받은 덕에 동네 전체가 편안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삼의사(의료기관 3곳)와 각 관청의 아전 등도 앞 다퉈 왜병에 귀순했다. 심지어 이들이 무사한 것을 보고 피난을 갔던 종친들과 사족들 중에서도 다시 성안으로 들어간 자들이 부지기수였다고 적고 있다.

오늘날의 경복궁을 재건한 건 대원군이었다. 1865년(고종 2) 4월 초에 왕실 중흥의 대업을 이룬다는 취지로 경복궁 중건에 나섰다. 그렇지만 나라 곳간이 부실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원군은 영건도감을 설치하고 도제조에 영의정 조두순과 좌의정 김병학을 임명했다. 조정 고관부터 지방 수령 이하 모두 역량에 따라 재원에 보태라고 했고 자진해서 원납하는 양반에게는 관직을 내리고 포상을 했다. 그러자 이틀 만에 한양에서 들어온 원납전이 10만냥을 넘었고 종친들도 수만냥을 냈다. 대왕대비도 10만냥을 내려보냈다.

20일 동안 3만5000여명이 참가하는 성대한 착공식을 마치고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듬해 공사장 임목장에서 발화한 불로 그동안 지은 건물과 자재가 몽땅 불타버렸다. 공사 중단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었고 천주교 탄압과 병인양요 등 국내외 상황도 뒤숭숭했지만 대원군은 공사를 강행해 3년만인 1868년 완공을 보았다.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은 다시 한 번 수난을 당한다. 일본의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의 조사를 바탕으로 경복궁 훼손이 시작됐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는다고  허물어 버려 400여동 건물 중 10분의 1인 36동만 남겨졌다. 근정전 서행각 너머에 축사를 설치하고 정화조를 만들어 온종일 가축 분뇨 냄새가 궁궐을 뒤덮기도 했다. 일제가 물러갈 때 경복궁 내의 건축물은 여염집 사랑방보다 못한 폐허로 남아 있었다. 

이 시간에도 경복궁 여기저기 가림막 안에서 개·보수가 진행 중이다. 경복궁이 하루속히 온전한 모습을 되찾아 또 하나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한국 건축예술의 미를 전 세계에 보여주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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