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봄의 정원을 서성이며 / 오경아
[백세시대 금요칼럼] 봄의 정원을 서성이며 / 오경아
  • 오경아 가든디자이너
  • 승인 2021.05.28 14:18
  • 호수 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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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아 가든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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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분노‧걱정 등이 있는 날

정원에서 풀을 뽑고 가꾸다 보면

나 자신 식물들의 일부가 되고

어느새 마음이 맑아지며

차분히 정리되는 걸 느껴

계절의 흐름이 내겐 꽃으로 온다. 겨울이 지나 땅이 녹자 마자 키를 낮춰 샛노랗게 올라오는 크로코스와 복수초를 시작으로, 트럼펫을 닮은 수선화가 피어나고, 뒤를 이어 튤립과 히야신스, 무스카리가 만발한다.

알뿌리 식물이 질 무렵에는 보라색 공 모양의 별꽃 알리움과 함께 산딸나무에 네잎 꽃이 피어난다. 신기한 건 산딸나무의 꽃은 처음엔 작은 연초록이라 눈에 보이지도 않다가 시간이 흐르면 점점 하얗게 변하면서 그 크기도 커져서 마치 흰 손수건을 걸어놓은 듯 보인다는 것이다. 

5월의 중순을 지나면서 정원엔 붓꽃과 알리움, 달개비로 온통 노랑과 보라로 가득하다. 꽃망울을 맺은 금계국과 수레국화가 곧 피어나면 6월의 정원은 다시 또 다른 보라와 노랑의 색채로 가득찰 것이다. 

어린 시절 엄마는 늘 아침마다 꿈 타령을 하면서 꿈자리가 어수선하니 몸조심하라는 얘기를 하곤 했다. 그때는 꿈에 집착하는 엄마가 이상하기도 했고, 반감도 생겨 ‘또 저런다’ 싶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의 내가 그때 엄마가 했던 것과 똑같이 꿈 타령을 하며 다 큰 두 딸을 단속한다. 애들이 어떤 마음으로 들을지를 충분히 짐작해도 기꺼이 기우를 보태주고 만다. 이런 날이면 달리 방법이 없다. 

운이 좋게 일이 좀 한가하면 정원 일에 몸을 맡겨본다. 사실 처음엔 몰랐는데 내가 하루 종일 말없이 정원 일을 하는 날은 뭔가 마음에 불편함이 있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됐다.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걱정, 불안함, 감정의 흔들림이 자꾸 마음속을 헤집으면 나도 모르게 정원 한 귀퉁이에 앉아 잡초를 뽑고, 가지를 잘라주며 시간을 보낸다. 

사실 정원 일을 하며 마음을 다스리기보다는 불어오는 바람, 내리쬐는 햇볕, 흘러가는 구름, 내 옆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들 속에서 나를 둔 채, 나 역시도 이 모든 것들의 작은 일부임을 느끼며 나를 위로한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도마에 김치를 썰고 나면 빨간 고춧물 얼룩이 잘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도마를 햇볕에 내놓으면 한두 시간 후엔 기가 막히게 김칫물이 사라진다. 과학적으로 설명되는 화학적 과정이 분명히 있겠지만 어쨌든 쉽게 말하면 햇볕 자체에 소독 능력이 있는 셈이다. 

흰 빨래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표백제를 써도 이미 변색이 되면 그 흰빛이 잘 나오질 않는데, 바짝 햇볕이 좋은 날 빨랫줄에 널어 말리면 정말로 그 흰빛이 더욱 선명해진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광목이불 호청을 빨랫줄에 널어서 말리면 그 파닥파닥한 촉감과 함께 맡아졌던 햇볕 향기가 결국 소독과 표백의 효과 때문이었던가 싶기도 하다.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며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자신도 소독되고 표백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조금은 소독되고 맑아진 마음속에서 차분히 무엇인가가 정리되기도 한다. 살다 보니 삶에서 생기는 문제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답을 찾으면서 흘러가게 두어야 할 것들과 내려 놓아야 할 것들을 내려놓는 용기를 배우는 듯하다. 

최근 남도 지방의 섬을 정원으로 개발하고 싶다는 고객을 만나 섬을 오가고 있다. 처음으로 섬에 가던 날은 날씨가 쾌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너울이 높아 배의 진동이 엄청났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은 어느새 잔잔해진 물결이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그때 바다를 두고 의뢰인은 이렇게 말을 했다. “바다가 시시각각 악마도 됐다, 천사도 됐다 합니다.” 바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원에 부는 바람도, 햇볕도, 비도, 눈도 이 모든 삶이 시시각각 천사도 됐다, 악마도 됐다를 반복한다. 

그래서 가만히 정원을 서성이다 보면 이런 소리를 듣게 된다. “지금 내 맘에 들끓고 있는 분노, 걱정, 슬픔, 불안도 곧 천사의 얼굴이 되어 나를 맞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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