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51] 얘야, 좀 더 있다 가려믄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51] 얘야, 좀 더 있다 가려믄
  • 김형술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 승인 2021.06.25 1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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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좀 더 있다 가려믄

 

농가에 비가 내리지 않았던들

갈 사람을 오래도록 붙잡아 두었겠나.

자식을 만나서 기뻐 취하고

묘시가 넘도록 달게 잤더니

냇물 불어 개구리밥 보에까지 붙고

바람 불어 꽃잎은 주렴을 치는구나.

내 시가 아직 안 되었다

자꾸만 타고 갈 말 챙기지 말렴.

 

不有田家雨 (불유전가우)

行人得久淹 (행인득구엄)

喜逢子孫醉 (희봉자손취)

睡過卯時甘 (수과묘시감)

川漾萍棲埭 (천양평서태)

風廻花撲簾 (풍회화박렴)

吾詩殊未就 (오시수미취)

莫謾整歸驂 (막만정귀참)

- 김시보(金時保, 1658~1734), 『모주집(茅洲集)』 권8 「빗속에 큰딸아이 가는 걸 만류하며[雨中挽長女行  (우중만장녀행)]」


이 시는 모주(茅洲) 김시보(金時保, 1658~1734)의 작품입니다. 김시보는 본관이 안동(安東)이고, 자는 사경(士敬)이며 호는 모주(茅洲)입니다. 조선후기 한시 쇄신을 이끈 백악시단의 일원으로서 시명(詩名)이 높았던 문인입니다.

시의 제목과 수련(首聯)의 내용을 보면 시집갔던 시인의 큰딸이 무슨 일인가로 친정을 찾았던 모양입니다. 출가외인(出嫁外人)이란 말이 있듯 조선시대 시집간 여성은 친정에 발걸음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습니다. 친정 부모의 생신이나 제사, 농번기가 끝난 추석에나 시부모께 말미를 얻어 친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친정을 찾은 딸아이는 더없이 반갑고 예쁩니다. 그래서 시인은 기쁜 마음에 술잔을 들었고, 그렇게 기분 좋게 늦은 단잠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시의 후반부입니다. 간밤 비가 아침까지 계속되어 보에까지 개구리밥이 붙고, 바람마저 불어 흩날리는 꽃잎이 주렴을 칩니다. 친정을 찾은 딸아이는 아마도 돌아갈 생각에 마음이 급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며느리에게 허락된 친정나들이는 하룻밤을 넘기지 않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 상황이었다면 당일에 시집으로 돌아가야 했을 텐데 비 때문에 하루를 유숙하게 되었으니 큰딸아이로서는 어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졸였을 겁니다. 그래서 돌아갈 말을 서둘러 챙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다릅니다. 서둘러 돌아갈 채비를 하는 딸아이, 그 마음을 십분 알면서도 아버지는 어여쁜 딸아이를 선뜻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핑계를 대며 마음 급한 딸아이를 붙잡습니다. ‘네가 떠난다 하니 내가 의당 전송시를 지어야 할 텐데, 아직도 시가 완성되지 않았구나. 조금만 더 있으려무나’하고 말입니다. 과연 시인은 시를 못 짓고 있었던 것일까요? 안 짓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 작품이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고금에도 변함없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틋한 사랑이 진실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중략) 남들 눈에 보이는 체면보다는 딸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이 마음이야말로 진실하고 소중한 것이라 여겼기에, 이렇듯 딸자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작품을 남겼던 것입니다. (하략)    

김형술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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