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보수 지식인에 듣는다-관훈클럽 초청토론회
진보·보수 지식인에 듣는다-관훈클럽 초청토론회
  • 함문식 기자
  • 승인 2009.02.23 14:48
  • 호수 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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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명예교수-이문열 작가 'MB정권' 논쟁

관훈클럽은 2월 18일과 19일 양일에 걸쳐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대표적 보수 지식인 이문열 작가를 초청, 오늘날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상황과 남북관계 및 한미관계 등에 대한 의견을 듣는 ‘관훈포럼’을 개최했다. 자연스럽게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한 진단과 촛불시위로 옮겨 간 두 석학의 토론은 날카로운 예봉을 양보하지 않고 치열하게 전개됐다. 백낙청 교수와 이문열 작가의 논지를 지상중계한다. 백낙청 교수는 현 시국의 극복을 위한 ‘민간의 참여’를 강조했고, 이문열 작가는 ‘촛불’로 상징되는 ‘불복’(不服)의 구조화를 깨기 위한 정권의 확고한 결단을 촉구했다.  <편집자 주>

진보-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국민통합,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정치인들은 국민통합이 무조건 좋은 것으로 전제하고 발언하는 사례가 많다. 그러나 완전한 국민통합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한 목표도 아니다. 의견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가 동일한 목표에 동의하기를 강요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국민통합’은 많은 함정이 따르는 개념이다. 그때그때 어떤 성격, 어떤 수준의 통합이 상대적으로 바람직한가를 판단해서 추구할 목표인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건, 분단 상황이건, 다문화 사회이건 한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국민통합이 필요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더구나 현재와 같은 비상시국에서는 보통보다 높은 수준의 통합이 필요하다.

그러나 국민통합을 약속하며 집권한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통합을 위한 자신의 노력을 국회와 국민이 뒷받침해야 한다고 역설할 뿐 통합을 이뤘다고 말하긴 어려운 형편이다.

경제위기는 갈라진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현재의 경제위기는 이명박 정부의 지지도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국정운영에 대한 반대가 훨씬 많다는 것은 기회를 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1년간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국민통합을 저해한 바는 너무도 많았다. 국민을 설득하지 못한 인사결정이 그랬고, 계층 간 경제격차를 줄이기보다 오히려 확대하는 경제, 사회정책이 그랬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태도가 문제였다. 일관된 것은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남들이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계경제가 나쁘고, 야당과 일부 불순세력이 발목을 잡고, 국민들이 몰라주기 때문에 일을 할 여건이 안 된다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책임지는 국민이 필요하다

어찌됐든 우리가 뽑았다. 그러나 우리가 뽑았기 때문에 다음 선거까지 불만이 있어도 꾹 참는 게 도리라는 주장은 극도의 무책임일 뿐이다. 그렇다면 민주시민의 권리와 의무는 투표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국민이 들고 일어나 당장에 정권을 갈아치우자는 주장 역시 무책임하다. 대안이 없는 정권교체는 말 그대로 현실과 괴리된 만용일 뿐이다.

그 점에서 ‘이명박 아웃’(MB OUT)의 구호를 외치기는 했지만 정권퇴진운동까지는 안 가고 정권에 대한 엄중한 경고에 머무르면서 주권자들의 한바탕 축제를 벌인 작년의 촛불시위는 국민들의 자기 책임을 이행한 적절한 수준과 창의적인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올해다. 지난해 여름의 축제는 재탕해서도 안 되거니와 올해의 상황이 달라진 만큼 국민이 책임지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2009년의 비상시국

지난해 여름과 달라진 2009년의 상황에 대해 나는 세 가지를 주목하고 있다.

첫째, 경제위기의 본격화다. 자영업자, 비정규직, 새내기 경제인구 등의 빈민화가 급속도로 진행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회적 폭발의 위험이 날로 증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남북 당국 간 단절은 위기극복의 결정적 장애로 작용할 것이다. 셋째, 가장 불행한 점은 이명박 정부가 지난 해 ‘촛불’의 엄중하지만 평화적인 경고를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무시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엇나가고 있다. 앞으로 설혹 시민들이 평화적인 축제분위기의 시위를 주도한다고 해도 강경진압으로 나올 것이 뻔하고 ‘용산참사’와 같은 사태가 재발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민들도 이런 참사로 인해 그냥 숨죽이고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고 정부의 입장도 바뀔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결과는 최악의 교착상태다. 지난 정부에서 이뤄왔던 일련의 개혁이나 대북 화해협력정책도 되돌려질 것이요, 전두환 박정희 시절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이룩한 한국경제의 기반마저 붕괴할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다양한 구상과 활발한 토론을

입법·행정·사법부, 언론 등 전통적인 장치의 기능을 살리면서 더불어 민간이 참여하는 새로운 기구와 관행의 창출도 필요하다. 예컨대 가장 강력한 집행력을 갖는 민간참여형태로는 특별검사제도나, 일정한 권한을 갖는 국가기구면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 이명박 정부 들어서 대통령 직속의 방송통신위원회로 되긴 했지만 이전의 방송위원회도 좋은 모델이었다. 노사정위원회는 민간기구이면서도 국가의 제도적 뒷받침으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민관합치에 더욱 어울리는 모델이기도 하다.

나라를 다스리는 체계의 문제를 두고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소통하며 원칙적인 합의를 도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남북관계처럼 초당적인 추진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보다 응집력있는 기구로 나아갈 수 있다. 처음엔 시국회의 같은 형식으로 출발하더라도 나중에는 노사정위원회나 국가인권위원회처럼 상설기구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보수- 이문열 작가

인터넷 광장의 착시 '불복 유혹' 키워

▲ 이문열 작가

가장 큰 문제는 오랜시간 굳어져 버린 우리나라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볼복의 역사다.

지금에 이르러 우리의 대의민주제는 지쳤고, 그 어느 때보다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다. 거기다가 때맞춰 나타난 인터넷 광장은 직접참여의 욕구를 폭발적으로 확대시켰다. 기술적으로 4000만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는 것이 가능해 지면서 그 광장을 선점한 사람들은 억눌려 있던 직접참여에의 욕구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일찍이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그들은 다수의 여론조작과 다수위장은 집단지성이라는 허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보다 섬뜩한 것은 대의제의 다수결에 대한 불복의 구조화다. 대의민주정체에서 패배한 소수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신하고 누구나 한 표씩을 행사하는 다수결을 부당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자신들은 셋이라도 멍청한 일곱을 이길 수 있다고 자만하는 비뚤어진 엘리트 의식인 것이다.

인터넷 광장의 착시현상은 소수를 다수로 보이게 하고 익명성 뒤에 숨은 조작은 터무니없는 소수에게 대표성을 안겨주어 다수로 혼동하게 만든다. 진정성을 유지하면서 여러 날 밤을 내리 촛불을 들고 나선 사람도 그리 많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들을 다수라고 여기는 까닭은 대선과정에서 불복한 이들이 거기에 집결했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우리 대의민주정의 불복의 구조화는 우리 현대사 특유의 피로가 묻어있기도 하다. 지난 권위주의 정권의 불행한 유산은 이른바 문민정부가 나타나도 불복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들었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근소한 득표율 차이는 불복의 구조화를 가져왔다. 

현 정권부터 시민참여는 불복의 구조화로 이어져

현 정권에 들어서는 불복의 구조가 상시적인 것으로 자리잡은 듯 하다. 오랜 불복의 구조를 가진 ‘그때 그 사람들’과 지난 10년간 신 기득권층으로 단맛을 즐긴 사람들, 그리고 지난 정권이 정성을 들여 기른 일부 시민단체가 카르텔을 형성하고 의회를 뛰쳐나온 야당의원들이 앞장을 섬으로써 이제 그 불복은 정교하고 견고한 구조로 우리사회에 자리 잡았다.

촛불마당은 상시적으로 열려있고, 구실만 생기면 자동으로 작동한다. 불복의 카르텔은 서로를 격려하며 지켜주기도 한다. 일부 방송은 촛불을 격려하고 부추기며, 촛불은 그 방송을 지키려고 시청과 여의도를 분주하게 오가는 정경을 낳은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불복의 대상은 이 정권만 아니라 이 나라 헌법체계의 근간인 대의민주정체다. 그 구조화된 불복은 대선을 통해 선출된 대통령의 통치권을 불구가 되게 만들었고, 그가 내건 공약들은 촛불에 그슬려 잿더미만 남게 됐다. 총선의 결과에 따라 다수당이 된 여당의 입법권도 그 완강한 불복의 구조에 걸려들어 무력화되고, 검찰의 기소권과 법원의 판결권까지도 촛불의 승인을 받아야 할 처지다.

우리 헌법체계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 정치체제에 정면으로 불복하는 구조를 만들어 시민참여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것에 다름 아니다. 나는 비틀거리는 이 나라 통치권과 갈수록 낭비와 비효율로 빠져드는 정치현실을 함께 냉정하게 돌아보고 싶을 뿐이다. 

국민통합이 불복의 구조화를 저지할 수 있어

불복의 구조화로 지친 대의민주정은 종종 비극적결말로 끝난다는 역사적 경험이 나를 침묵하지 못하게 한다. 독일 국가사회주의(나치스)의 출현은 지친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의민주정체가 산출한 기형아이며 일본 군국주의도 다이쇼(大正) 민주정의 불행한 유산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이는 중남미의 포퓰리즘을 지친 현대의 대의민주제에 대한 불복의 구조화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역사적 경험들이 우리에게 닥쳐올 소지가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치유를 강구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 우리사회의 존립까지 위협하고 불복의 구조화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국민통합을 회복하는 길이다. 보다 상위의 공동선을 개발해 불복을 조장해 온 자질구레한 대의를 압도할 수 있다면 분열을 봉합하고 불복이 구조화 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방안은 자칫 구호로 그치고 말 공산이 커 보인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불복세력의 자제이다. 자신들에게도 집권의 기회는 남아있고, 그 때 다시 불복의 구조화로 인해 자신의 통치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불복의 구조화를 막아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불복을 넘어 승리의 확신까지 품고 이 정권에게 전면적인 투항을 권고하는 인상까지 주기도 한다.

불복의 구조화를 해소하는 마지막 방안은 정권의 결단이다. 적극적으로는 확고한 자기방어의 의지로 대의민주제를 근간으로 하는 헌법체계를 수호할 효율적인 수단과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함문식 기자 moon@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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