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만에 돌아온 홍범도 장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 빛나는 독립군 영웅
100년 만에 돌아온 홍범도 장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 빛나는 독립군 영웅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1.08.20 15:27
  • 호수 7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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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독립 무장투쟁사에 길이 남는 두 번의 대승을 이끈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국내로 돌아오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사진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에서 묵념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우리나라 독립 무장투쟁사에 길이 남는 두 번의 대승을 이끈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국내로 돌아오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사진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에서 묵념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평양 출생, 9살에 고아… 1907년부터 국내‧연해주서 의병활동 본격화

대한독립군 등 이끌며 일본군 격퇴… 광복 2년 전 카자흐스탄서 눈 감아

[백세시대=배성호기자] 1920년, 우리나라 독립 무장투쟁사에 길이 남는 두 번의 전투가 벌어진다. 6월 봉오동전투와 10월 청산리대첩이 그것이다. 홍범도 장군(1868~1943)은 이 전투를 모두 지휘하며 일제의 심장에 비수를 두 번이나 꽂았다. 하지만 그는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3년 10월 25일 이국땅인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눈을 감고 그곳에 묻혔다. 

그리고 지난 8월 15일 홍 장군은 그토록 염원했던 자유 대한민국의 땅에 돌아왔다. 고국을 떠난 지 100여년만에 일이다. 정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8월 17일 1급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앞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던 독립운동가는 안중근, 윤봉길, 김좌진, 김구, 안창호, 한용운, 강우규, 신익희, 이준, 최익현 뿐이다.

홍범도 장군은 평양 서문안 문렬사 부근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 고독과의 싸움이었다. 태어난 지 7일 만에 출산 후유증으로 어머니를 잃었고 9살 되던 해에는 부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됐다. 이후 홍 장군은 부잣집의 머슴 노릇을 하며 힘겹게 성장했다.

홍범도 장군이 지도자로서 각성한 계기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일제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자국 상인과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군대를 파견했다. 경복궁까지 난입해 무력으로 민씨 세도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정권을 수립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듬해에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며 우리나라의 주권을 제약했다. 특히 국모를 난도질하고 그 시신마저 장작더미에 던져 태워버렸다는 얘기를 듣고 홍 장군은 울분을 토하며 항일투쟁 의지를 불태웠다.

이후 1895년 10월, 홍범도 장군은 강원도 단발령에서 포수 김수협을 만나 의기투합한다. 그들은 항일 의병을 일으킬 것을 맹세했고 곧 무장한 일본군 12명을 제압하며 무장투쟁사를 써내려간다. 

하지만 수차례 일본군과의 전투를 치르며 김수협 등 함께했던 동료들이 전사하자 1897년부터 함경남도 북청에 정착해 1907년 후반까지 사냥과 농사에 종사했다. 이때 홍 장군은 일대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연대’를 조직해 대장으로 활약하며 포수들의 권익보호에도 앞장섰다. 

그러다 1907년 9월 일제가 의병활동을 선제적으로 막기 위해 ‘총포 및 화약류 취체법’을 강제 시행하자 같은해 11월 포수들을 중심으로 화전농민, 광산노동자, 해산군인 등 70여 명을 규합, 의병부대를 다시 결성했다. 이때부터 이듬해인 1908년 11월 연해주로 망명하기까지 홍 장군의 부대는 일본군과의 격전에서 여러 차례 승전보를 울린다. 일본군을 비롯해 순사, 일진회 회원, 친일 관리 등을 응징하고 처단해 ‘(하늘을) 나는 홍범도’로 불리게 된다. 

홍 장군은 연해주로 옮긴 뒤에도 이상설, 최재형 등과 함께 ‘권업회’를 조직해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이어간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홍 장군은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와 논의 끝에 그해 9월 간도로 이동, 봉오동전투의 주역 중 하나인 대한독립군을 지휘하게 된다. 

당시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 300여명 병력 규모로 소총 200여정, 권총 약 30정의 화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홍 장군이 지휘한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대규모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한다. 독립군의 대대적인 기습에 일제는 250명의 병력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독립군을 쫓아 중국 만주의 봉오동에 이른다. 

하지만 이곳엔 이미 홍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이 통합해 조직한 대한북로독군부가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독립군 통합부대는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유인해 대승을 거뒀다. 당시 독립신문이 기록한 내용에 따르면 일본군은 봉오동전투로 157명이 사살되고 수많은 인원이 중경상을 입은 반면 독립군의 피해는 미미했다.

봉오동전투 이후 홍 장군은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연합, 1920년 10월 청산리 일대에서 또다시 대승을 거둔다. 일본군 전사자는 1200여명, 부상자는 2100여명에 달했다. 반면 독립군측은 사망 130여명, 부상자 220여명뿐이었다.

별명대로 하늘을 날던 홍 장군의 기세는 ‘자유시 참변’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꺾인다. 일제와 결전을 치른 한인 무장세력은 볼세비키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며 자유시 일대로 집결한다. 그러나 집결한 한인 부대의 통솔권을 둘러싸고 한인무장세력간 충돌이 발생, 다수의 희생자를 낸다. 이로 인해 한인무장세력은 러시아의 강력한 통제를 받게 돼 활동이 제약된다.

지휘권을 잃은 홍 장군 역시 연해주 등지에서 집단농장과 협동농장 등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한인동포들의 권익보호에 힘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활 속에서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이 진행되자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게 됐고 결국 낯선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광복 이후 그의 업적이 비로소 재조명됐고 크즐오르다 묘지에는 홍범도 장군의 반신 동상이 세워지고, 생전에 살았던 곳은 ‘홍범도 거리’로 명명됐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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