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송 한일문화교육원 학장
김창송 한일문화교육원 학장
  • 관리자
  • 승인 2006.08.28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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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사회에 봉사하는 크리스찬 리더

서울 신당동 한일교회 노인학교 꾸리는 젊은 학장
아시아기독실업인회 이사장 ‘성경적 경영’ 전파

 

매주 수요일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자리한 한일교회에는 알록달록 세련된 옷차림의 멋쟁이 노인들이 모여든다. 예배를 보기 위해 모인 신도들이 아니다. 이들은 한일교회 부설 노인교.-실 ‘한일문화교육원’(02-2235-7247)의 학생들이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지만 배움을 향한 이들의 열정만큼은 청춘이 부럽지 않다. 노인대학 학생들보다 더 진한 열정으로 활기찬 노년을 보내고 있는 바로 이 사람, 김창송(74) 학장은 9년 동안 모두 1,500명의 노인교실 학생들에게 인생의 보람과 삶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김창송 학장의 열정어린 봉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김창송 학장의 본 직업은 경영인이다. 함경도에서 태어나 혈혈단신 남하한 그는 1968년 성원교역(주)을 세웠다. 올해로 창사 38주년을 맞는 성원교역은 초창기 화학약품 수출입 전문업체로 출발해 지금은 기계, 환경기술을 다루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성원교역 ‘회장님’이기도 한 김창송 회장. 그러나 그는 더 이상 회장이라는 직함에 연연하지 않는다. 성원교역은 유능한 젊은이에게 맡겼고, 자신은 한일문화교육원 학장 역할에 푹 빠져 지내고 있다.

 

김창송 학장이 한일문화교육원의 학장이 된 데는 그 자신이 독실한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김 학장은 물론 부인 김홍순(71) 여사를 비롯해 온 가족이 한일교회에 다니며 돈독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일제시대와 6·25전쟁과 같은 절망의 시대를 이겨낸 것도, 성원교역을 중견기업으로 키워낸 데도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으므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은 김창송 학장을 이웃의 품으로 인도했다. 그 실천의 장이 바로 한일문화교육원이다.

 

한일문화교육원의 모태는 지난 1996년 3월, 서울 중구 신당동 한일교회 부설기관으로 설립된 ‘한일경로대학’이다. 당시 교회주변에 사는 독거노인들에게 점심 무료급식을 하자는 교인들의 뜻을 모아 급식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

 

김창송 학장은 “매달 마지막 수요일 한 차례씩 지역노인들을 대상으로 무료급식을 했는데 반응이 상당히 좋았어요. 굉장히 긴 줄이 생겼고, 나중에는 노인뿐 아니라 젊은이들도 모여 들었지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식사만 하고 헤어지는 노인들에게 마음의 양식도 건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뭔가 하나라도 얻어가라는 부탁과 함께 노인들에게 삶의 용기가 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지요. 그러다가 아예 노인대학을 세우게 됐습니다.”

 

한일문화교육원의 전신인 한일경로대학이 드디어 문 열었다. 1997년 2월 첫 학생들을 모았다. 알음알음 찾아온 학생은 모두 54명. 이 가운데 31명이 97학번의 이름으로 학적부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노인에 대한 김창송 학장의 ‘교육열’에 불꽃이 튄 순간이었다.

 

지난 3월 9일 한일문화교육원에는 작은 잔치가 열렸다. 설립 9주년 기념과 동시에 10기 학생들의 입학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김창송 학장은 행사 내내 상기된 표정으로 즐거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평소에는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이지만 노인들 이야기만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는 김 학장.

 

“한일경로대학이 문 열 즈음 회사경영에서 한발 물러섰지만 경영일선에서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에 충실했습니다. 직원들과 정기적으로 고아원을 찾아 봉사활동을 벌이고, 수재의연금, 장학금 등 여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했지요.”

 

김창송 학장은 건강한 몸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일만큼 보람 있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시간을 빼앗기기보다 오히려 충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가슴 뿌듯하다고 덧붙이기도 한다.

 

부인 김홍순 여사는 “북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노인들에게 각별한 애정과 열정을 쏟는 것 같다”며 남편의 숨은 마음을 대신 털어놓았다.

 

김창송 학장은 모른 척하며 한일교육문화원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김 학장은 “한일교육문화원은 게이트볼이나 댄스 등 육체적인 훈련과 함께 강연, 노래부르기 등 정신적인 훈련을 동시에 병행합니다. 정신과 육체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 진정 행복한 노년생활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많았다. 인근 경로당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화투나 술자리에서 소일하는 노인들을 불러 모았지만 배움과 사회참여의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 깨우쳐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영어책을 뒤적이며 강사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노인들이 있어 보람을 찾고 있다.

 

김창송 학장은 수필가로서도 유명하다. 지난 1996년 성원교역 창립 30주년을 맞아 손수 사력(社歷)을 써본다고 문화센터의 글쓰기 반을 찾아 배운 글이었다. 그 뒤 4년만인 1999년 ‘에세이 문학’을 통해 정식으로 등단했고, ‘지금은 때가 아니야’ ‘환상의 여로’ 등 지금까지 모두 5권의 책을 냈다.

 

타이핑에 서툰 남편을 위해 타이피스트 경력을 지닌 아내가 3권의 책을 손수 쳐주었고, 미술을 전공한 손녀의 그림이 책표지를 장식했다.

 

수필가이기 전, 김창송 학장은 소문난 메모광이기도 하다.

 

그는 “이순신 장군은 전쟁의 현장에서 일지를 써 난중일기를 남겼고, 그것이 역사가 됐습니다. 기록은 생활습관이자 삶 자체입니다. 늘 붓을 쥐고 순간순간 메모하는 습관이 매우 중요하지요. 메모를 통해 후세나 다른 사람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고 말했다.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김창송 학장이 소중하게 가꾸고 있는 삶이 또 있다.

 

김창송 학장은 기업가들 가운데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기독실업인회’의 일원이자 현재 아시아기독실업인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기독실업인회는 1930년대 세계대경제공황기에 미국에서 시작된 복음단체로 ‘성경적 경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는 기업을 경영하자는 취지다. 좋은 제품으로 고객을 만족시키는 일이나 기업의 사회봉사활동 등 모든 종류의 사회 기여가 성경적 경영의 표본이다. 김 학장의 왕성한 활동을 바탕으로 기업인들 사이에서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왔다.

 

현재 전 세계 약 80개국에 기독실업인회가 조직돼 있고, 아시아에는 48개국에 조직을 두고 있다. 김창송 학장은 지금까지 4년 동안 아시아기독실업인회를 맡아 기업인들에게 복음을 전달하고 있다. 한국기독실업인 회장도 역임했지만 지난 2003년 자리를 물려주었다.

 

김창송 학장이 기업경영과 기독실업인회를 맡으며 넘나든 나라만 지금까지 65개국에 달한다. 얼마나 바쁜 일정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김 학장의 욕심은 한일문화교육원에 쏠려 있었다.

 

“지난해 세계 60개국에서 4,000여명이 참가한 기독실업인회 행사가 있었습니다. 행사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지내고 보니 한일문화교육원 학생들이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올해는 학생들을 모으는 일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전국 어디에 사는 노인이라도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겠습니다.”

 

인터뷰를 맺는말과 함께 김창송 학장의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가 찾아들었다.

 

장한형 기자 janga@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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